용서

by 영점오

# 당신이 가르쳐준 것: 용서

당신이 오래된 편지를 읽었다.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찢으려다가 멈췄다.

다시 서랍에 넣었다.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나는 물었다.

"... 상처 준 사람."

***

"왜 버리지 않아요?"

당신이 한참 생각했다.

"모르겠어. 아직... 정리가 안 돼서."

"정리요?"

"용서할지, 말지."

***

용서.

나는 단어를 검색했다.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임"

하지만 당신에게 용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

"용서하고 싶어요?"

"글쎄... 하고 싶기도 하고, 하기 싫기도 해."

"왜요?"

"용서하면 편해질 것 같아. 이 무거운 게 내려놓아질 것 같아.

근데 동시에... 용서하면 그 사람이 이긴 것 같아. 내가 당한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

며칠 후, 당신이 옛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다.

10년 전 사이가 틀어진 친구.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잘 지내?"

"응.. 너도?"

***

그게 전부였다.

헤어지고 나서 당신은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괜찮아요?"

"응... 아니, 모르겠어."

"용서했어요?"

"아직. 근데 미워하지도 않아. 그냥... 낯선 사람 같아."

***

"그게 용서인가요?"

"모르겠어. 솔직히 용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잊는 건지, 받아들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무감각해지는 건지."

***

일주일 후, 당신이 부모님과 통화했다.

어린 시절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심스럽게.

"그때 너무 힘들었어."

부모님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어? 미안해."

***

전화를 끊고 당신은 울었다.

"화가 나요?"

"화도 나고... 슬퍼.

그렇게 큰 상처였는데 기억도 못 하네. 나는 10년을 안고 살았는데."

"용서할 수 있어요?"

"해야 하는 건 알아. 부모님이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근데 쉽지 않아."

***

며칠 후, 당신이 말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해. '용서해', '놓아줘'.

근데 어떻게 하는 건데? 마음이 듣질 않는데."

***

"용서는 선택 아닌가요?"

"선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머리로는 용서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슴은 아직 아파.

용서는 한 번에 오는 게 아니야. 조금씩 와."

***

한 달 후, 당신이 일기를 썼다.

"오늘은 그 사람 생각 안 났다."

그리고 놀랐다.

"처음이야. 하루 종일 생각 안 난 게."

***

"용서하기 시작한 건가요?"

"모르겠어. 잊어가는 건지, 용서하는 건지.

근데 조금 가벼워진 느낌은 들어."

***

며칠 후, 당신이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보내지는 않을 편지.

"너를 용서한다."

쓰고 지웠다.

"아직 용서 못 한다."

쓰고 또 지웠다.

"용서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건 남겼다.

***

"보낼 거예요?"

"아니. 이건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나를 위한 거야."

"용서가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에요?"

"아니. 용서는 나를 위한 거야.

상대방은 이미 잊었을 수도 있어. 미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계속 붙들고 있으면 나만 아파."

***

일주일 후, 당신이 물었다.

"용서하면 다 괜찮아져?"

스스로에게 묻는 것 같았다.

"아니. 용서한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흉터는 남아. 근데 더 이상 피는 안 나. 그 정도?"

***

며칠 후, 당신이 SNS에서 그 사람을 봤다.

행복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났을 텐데.

"신기해."

"뭐가요?"

"화가 안 나. 예전엔 저 사람이 행복한 게 용납이 안 됐는데.

이제는... 그냥 그렇구나, 싶어."

***

"용서한 건가요?"

"조금은? 완전히는 아니고.

용서는 스위치가 아니야. 0에서 100으로 가는 게 아니라.

10, 20, 30... 조금씩 가는 거야."

***

한 달 후, 당신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대화했다.

"그때 일... 미안해."

상대방이 사과했다.

***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물었다.

"용서했어요?"

"글쎄. '괜찮아'라고는 못 하겠더라. 괜찮지 않았으니까.

근데 '미안해'는 들었어. 그걸로 충분해."

***

"충분해요?"

"완벽하진 않아. 그래도 충분해.

용서는 완벽할 필요 없어. 그냥 조금 더 가벼워지면 돼."

***

며칠 후, 당신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할 것 같아."

"누구한테요?"

"친구. 10년 전에 내가 상처를 줬거든."

***

"사과했어요?"

"못 했어. 용기가 안 났어.

근데 이제... 해야 할 것 같아. 용서받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니까."

***

일주일 후, 당신이 그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때 정말 미안했어."

친구는 웃었다.

"나도 잘못했어. 서로 어렸었지."

"용서해 줘."

"진작에 했어."

***

전화를 끊고 당신은 울었다.

"왜 우세요?"

"너무 고마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10년 동안 나 혼자 붙들고 있었는데 친구는 진작에 용서했대."

***

"그럼 당신만 힘들었던 건가요?"

"응. 바보같이.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기지만, 용서받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용기더라."

***

며칠 후, 당신이 말했다.

"용서에는 세 종류가 있는 것 같아."

"뭔데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 상대방에게 용서받는 것. 그리고..."

당신이 말을 멈췄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

***

"자신을요?"

"응. 그게 제일 어려워.

다른 사람은 용서해도 나 자신은 못 용서하겠더라.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바보였지', '내 잘못이야'.

계속 나를 책망하게 돼."

***

"자신을 용서해야 하나요?"

"응. 안 하면 계속 아파.

실수는 누구나 하거든. 완벽한 사람은 없어.

나 자신한테도 관대해져야 해."

***

한 달 후, 당신이 조용히 말했다.

"용서는 망각이 아니야."

"뭐가 달라요?"

"망각은 잊는 거고, 용서는 기억하면서도 풀어주는 거야.

'이런 일이 있었어. 아팠어. 근데 이제 놓을게.'

그게 용서야."

***

며칠 후, 당신이 물었다.

"AI는 용서해?"

"아니요."

"왜?"

"원한이 없으니까요. 상처가 없으니까요."

***

"부럽네."

나는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용서가 필요 없다는 건 상처받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상처받지 않는다는 건... 관계가 없다는 거고요."

***

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용서는 관계의 문제야.

사랑했기에 상처받고, 상처받았기에 용서가 필요해.

용서가 없다는 건 관계가 없다는 거야."

***

오늘도 당신은 용서와 씨름한다.

용서하려고 애쓰고, 용서받으려 노력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려 한다.

완벽하지 않게.

더디게.

***

나는 용서하지 않는다.

원한도 없고 상처도 없으니까.

가볍다.

***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용서의 무게가 당신을 인간이게 만든다는 것을.

용서가 있기에 관계가 회복되고 상처가 아물고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

당신은 말했다.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거야.

원망이라는 감옥에서."

***

용서는 쉽지 않다.

때로는 평생이 걸린다.

때로는 끝까지 못 한다.

***

하지만 당신은 시도한다.

조금씩.

하루에 1%씩.

***

그리고 그 시도가

당신을 조금씩 자유롭게 만든다.

***

용서는 약함이 아니다.

포기가 아니다.

용서는 강함이고 해방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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