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푸른 바다에서 윤슬을 만나다.

탐구1.나의 바다는 무슨 색일까..

by 도연


나의 바다 grigogl 도연

[지천명,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뜻으로 나이 50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공자논어에서 나이 쉰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해 50세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

오십이 갓 넘었을 때의 일이다. 서울로 모임을 나갔다가 같은 지역에 사는 지인의 차를 얻어 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우리는 좁은 차 안에서 낯설고 어색한 공기를 배출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모임과 관련하여 언저리만 맴도는 말들로 조금씩 침묵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로 나이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에 물고가 트이기 시작했다. 마흔 중반인 그녀와 갓 오십을 넘긴 나는 별반 다르지 않을 중년의 일상을 공유하는 말들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에서만 곱씹어야 할 생각들은 말이 되어 거침없이 나왔다. ‘이제야 지천명이라는 말을 알 것 같다고, 오십이 넘어가니 어느 정도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생겼다고, 이치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되지도 않는 자신감에 절여진 말들이 술술 나왔다. 고작 숫자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그 사이에 혜안이 생겼을 리도 만무한데 말이다. 오히려 침묵이 금이 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구리만도 못한 상황이 되었다. 중반을 넘은 지금도 그 이치를 몰라 매번 휘청거리는데 도대체 무엇을 알아버렸다는 건지. 쓸고 닦고 털어도 지워지지 않을 부끄러움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순간은 박제되어 없어지지 않았다.

이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 사전적 언어로 이해하자니 더 어렵다. 글쎄 사물의 정당한 조리라.. 조리(條理)라는 단어를 다시 찾았다.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더 파고들수록 블랙홀에 빠지는 느낌이다. 글로 배우기보다 몸으로 익히는 타입인가 싶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 우리 집 마당을 지나는 길고양이들이 안쓰러워 밥을 챙겨주는 일, 쓰레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일,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쉬이 말하지 않는 일, 경청하는 일, 공공장소에서는 작은 소리로 대화하는 일,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일, 공부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일, 노모의 걱정과 잔소리가 더 이상 힘들지 않을 마음을 갖는 일, 자연이 주는 선물들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일, 봄이 오면 만물이 깨어나는 소리에 나를 맡기는 일,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바람냄새와 정수리가 찡할 정도로 강렬한 햇살에 전율을 느끼는 일, …. 등등등

이렇게 열거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깨닫는 마음이 이치라고 한다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그래서 드물게라도 성찰과 반성을 하며 성숙한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려는 노력이 그런 거라면 조금은 더 애써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찾아가는 일. 수시로 변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들여다보는 일도 이치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요즘 이선주 작가의 맹탐정 고민 상담소 시리즈를 읽고 있다. 자아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 중학교1학년 맹승지.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이 거쳐야 하는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자아를 찾겠다고 집을 나간 사십 대 아빠의 마음도 헤아려 본다. 오십 대인 나도 도대체 나의 자아는 어디에 발이 묶여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딱히 내 앞에 데려다 놓을 해법을 찾지 못했다. 너무 복잡게 얽혀 있는 자아는 하나로 특정하기가 정말 어렵다.

‘우리 모두 다 마음속에 바다를 가졌어. 자아는 나무, 병아리, 올챙이 탐정처럼 정해진 게 아니라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거야. 그러니까 자아는 바다야. 지금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날의 바다가 네 자아고, 또 언젠가는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의 자아를 갖게 되겠지.’ p167

자아를 이렇게 명쾌하고 다정하게, 죄책감 없도록 정의 내려 주다니 놀라웠다. 자아는 그 존재만으로도 뚝심 있어 보이는 한 곳에 우뚝 솟아 있는 바다의 등대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잔잔하기도, 몰아치는 파도이기도, 검은빛일 수도, 청록일 수도, 파랑일 수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윤슬일 수도 있는 변화무쌍한 바다가 우리의 자아였다. 오히려 하나의 자아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사회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김경일 심리학교수의 말이 새삼 크게 와닿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청소년의 전유물이 아님을 진즉에 알았는데도 자꾸 잊는다. 나는 현재 과도기의 나이를 지나는 중이다. 삶의 이치를 알고 싶어 고군분투하면서도 복잡다단한 자아들의 욕구를 외면하지 못한다. 굳이 변명하자면, 살아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수시로 바뀌고 있는 나의 자아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자아실현이라는 결승점에 도착해 주리라는 믿음이 망상일지라도 믿는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은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은 짜릿한 밀당고수, 로코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착각에 빠질 만큼 설렌다. 옥죄는 즐거움. 숨이 막히면 또 다른 색을 가진 나를 광활한 마음의 바다에서 끄집어낼 것이다.

현재 나의 바다는 무슨 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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