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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Feb 09. 2023

합스부르크 600년을 통해 얻는 또하나의 기억(신문기고

신문 기고 글

합스부르크 600년을 통해 얻는 또하나의 기억(후기)

참으로 뜻깊은 예술여행 합스부르크의 600년의 역사를 둘러볼 기회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3월 1일까지(기간 연장한다 함)의 전시 속에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해외여행의 어려움 속에서 국내 미술 관계 관심이 젊은 층에 옮겨져 가면서 다양하고 폭넓은 세계의 미술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합스부르크 하면, 유럽을 흔들던 당시 제후들의 입맛에 맞는 자를 찾기 위해 10세기 말 스위스 북동쪽의 시골구석에 등장한 약소 호족이었던 이들에게 13세기 초 유럽의 제후들은 루돌프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세움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이 결정은 유럽과 세계를 흔드는 지각 변동의 출발점이었음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외관상 무능력해 보였던 루돌프는 자신의 야심을 숨긴 채 왕국을 점차 굳건하게 세워가기 위한 물밑작업을 이루었고 그 결과물이 유럽이 흔들 수 없는 거대한 왕 “카를로스 5세”의 탄생을 알리게 된 것이다. 카를로스 5세는 당시 합스부르크령이었던 스페인의 왕이 됨으로써 “카를로스 1세”로 등극을 하며 조모 이세벨을 중심으로 콜럼버스의 도움으로 움직였던 대항해시대의 화려한 제국을 완성한 위대한 왕이 되었다. 그 결과물로 동양까지 그 세력의 범위를 확대해 나감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물론, 펠리페 2세가 영국의 엘리자베스가 이끄는 드레이크의 함대에 패배 후, 무적함대의 무너짐과 함께 그 이름도 영국이 가져가게 되었다.


운명의 흐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카를로스 5세는 자신 아들 펠리페에게는 스페인을 그리고 동생에게는 오스트리아를 맞기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두 갈림길로 걸음을 걷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200년 만에 합스부르크의 명맥을 잃어버리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펠리페 5세)에게 넘어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부단히 성장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고, 그 사이에 마리아 테리지아 여제의 등장으로 합스부르크의 부흥을 꿈꾸었지만, 비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전체의 마음은 아니며, ‘고인 물은 언젠가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라는 것이 역사의 순환적 올바른 가르침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앙투아네트도 결국 평범한 여인으로 살았다면 행복했을 텐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처럼 후손을 잊지 못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을 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근친혼은 결국 유전적 결함으로 이어져 단명하는 사태들이 발생했고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고, 합스부르크는 영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작은 한 도시에서 야망을 품고 준비한 한 사람으로 인해 거대 제국을 이루기까지의 흥망성쇠를 우리는 합스부르크 600년을 보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느끼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이념과 철학에 모든 것을 가두기 시작한다면 결국은 역사의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며 남겨진 유산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그랬구나“하는 안타까움의 탄식이 나올 뿐임에 가슴이 아프다. 다시 말해, 이념이 하나의 정착된 이론이 되는 순간 그 이념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역사의 현장이 바로 합스부르크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미리 언급하고 시작하면, 합스부르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 나뉘게 되는데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합스부르크 관련 작품들이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물론 개인적으로 매일 바라보던 그림들이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합스부르크의 거대 제국을 완성한 카를로스 5세의 기마상이나 화려한 문화 예술을 꽃피웠던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펠리페 2세의 자화상은 프라도 미술관에 나란히 걸려서 색채의 마술사이며 거장의 붓터치를 마음껏 표현해 준 티치아노의 그림을 바라보며 제국의 위대함과 황제의 그 의미들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 또한 언급해보자면, 무엇보다 공간의 협소함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다. 마치 중세 스페인의 미술 배경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이해할 좋은 기회였는데, 마르가리따 공주의 초상화는 시녀들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그 원근법과 황금선 기법 등 다양한 빛의 향연을 누릴 수 있는 작품을 어두운 공간에서 보자니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 아마도 프라도미술관과 티센미술관의 밝은 공간에서 보던 그림의 시간이 길어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여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우리 인식의 많은 변화를 일깨워주고 있다. 합스부르크의 출발부터 그 마지막까지의 이야기를 회화와 조각 그리고 다양한 전시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고 그 시대상을 느끼도록 안내하고 있다. 오디오와 도록을 통해 더욱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구성에 너무 설레이는 시간이었다. 함께 한 이들에게 작품을 설명하며 지나갈수록 화가들이 표현한 합스부르크의 영광은 그대로 묻어났기에 더 했던 것 같다.


합스부르크 600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역사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중요한 건, 먼 훗날 하나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나라가 될 것인지 아니면 더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나라가 될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유산이 아닐까? 합스부르크 600년의 역사를 보면서 정치 경제의 리더와 예술가들에게 숙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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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600년전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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