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학원을 옮긴 지 두 달 후 티라노씨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입학까지 남은 두 달의 방학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역전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를 학원에서 두고 볼 리 없었다. 정규수업은 원래 4시간씩 주 2회인데, 방학이 되니 7시간씩 주 3회 수업을 한다. 이래놓고 일요일에도 불러서 3시간 정도 틀린 문제들을 고치다가 모르는 문제는 질문하고 온다. 학원 시스템이 어찌나 철저한지. 이래서 학군지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수요일에는 원장 선생님의 수리논술 특강까지 있는데, 탑반만 해준단다. 티라노씨가 뭐라도 된 것 마냥 괜히 으쓱하고 뿌듯하다. 아이가 좋은 쪽으로 뭐라도 된 대접, 반가운 낯섦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 티라노씨는 모든 공부를 전부 때려치운 지 반년이 넘었고, 그나마 학교에서 수학 숙제만 한다. 학교를 안 나가니 숙제를 할 시간과 공간이 사라져 버린 게 문제였다. 그런 티라노씨에게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 사이의 2달 공백이 생긴 것이다. 어쩌지? 궁리를 시작한다.
"도시락을 싸줄 테니 학원 점심시간에 숙제를 하면 어떨까?"
겨우 짜낸 방안이었다. 집이 아닌 학교나 학원 쉬는 시간에 숙제를 할 때는 집중력을 잘 발휘한다는 데서 착안했다. 티라노가 동의한다. 알겠단다. 방학특강 첫날, 간식밥 도시락을 쌌다.
방학특강 첫날 점심시간, 현관에서 티라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점심시간에 숙제하기로 했는데 싸준 간식밥을 고대로 들고 와서는 집에서 쉬다 가야겠다며 녹초가 된 표정으로 들어온다. 4시간 수업하고 기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고등수학 교재가 어려웠나, 아직 학원 친구들이 낯선가, 그럼 숙제는 언제 하지? 이 생각 저 생각이 든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집에서 숙제하는 습관을 다시 들여보면 어떨까?"
티라노가 거절하거나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갈까 무서워 회피하던 질문을 결국 던져본다. "하루 10분씩 알람을 맞추고 시작해 보자! 컴퓨터 책상을 사서 공간 분리부터 해볼까?" 새로운 제안도 해본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컴퓨터 본체가 바닥에 있는 데다, 전원버튼이 뒤에 있어서 켜키 어려워서 방해 안돼."란다.
본인도 급한지, 웬일로 컴퓨터를 켜지도 않은 채 책상에서 숙제를 한다.
'아 이제 됐다. 한번 앉기가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지! 시작이 반인데 시작했잖아!'
낯설지만 아름다운 뒷모습에 괜히 뭉클해진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자 소리가 안 나는 앱으로 몰래 사진도 찍는다.
저 날은 유독 용기가 났던 걸까, 기분이 좋았던 걸까. 할 수 있다며 파이팅을 아무리 해줘도 후론 책상에 앉기조차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들기 전 다 큰 예비 고1 아들이 울먹이며 고백한다.
"엄마, 난 책상 앞에 서면 앉는 게 너무 두려워. 마치 화산폭발을 하기 시작한 활화산 앞에 서있는 그런 기분이야. 난 그 정도로 책상에 앉는 게 너무 겁나고 힘들어."
'힘든 학군지에서 목표 점수에 도달하지 못한 반복된 부정적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았구나.'
'이게 바로 책에서 말하던 과잉열망형 무기력인 건가.'
'어리석게도 느린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했었구나.'
자책과 후회가 또 한가득 몰려온다.
티라노씨는 터지기 일보직전 두려움이라는 화산 앞에 있다면, 난 불안과 후회라는 쓰나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우리가 도망가는 속도보다, 용암과 쓰나미가 오는 속도가 빠르다. 이러다 곧 우리를 덮칠 것만 같다. 어떻게 도망가지?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렇게 숙제는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숙제를 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 클리닉 3~4시간뿐이었다. 원래는 틀린 문제를 고치거나 질문하는 시간이지만, 숙제가 늘 밀리는 티라노씨는 그때 숙제를 하다 오는 거였다.
"어쩌다 이런 애가 최상위반에 들어왔냐고 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아이가 부모 뜻대로 잘 안되네요. 이런 아이를 맡겨두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수학선생님께 이렇게 말하니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으며 말한다.
"티라노가 수학 감각이 정말 좋은데, 아이가 순하고 착해요. 아직 애기에요."
'순하고 착하죠. 전전두엽이 투명하거든요.' 속으로만 대답한다.
방학이 흘러갈수록 점점 예민해져 한마디 말도 못 하게 한다.
비록 공부는 망했지만 부모 자녀와의 관계만큼은 충분히 형성했고 회복했다고 자부해 왔다. 어라? 이러던 아이가 아닌데 이상하다. 남들이 말하는 '방문 걸어 닫는 사춘기'가 이제야 온 건가 싶어 아찔하다.
초5 때부터 정신없이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기에 사춘기가 온 지 3년이 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사춘기가 아니었던 걸까. 이제 사춘기 시작이라면 더 힘든 무언가가 남은 걸까. 놀랍고 어이가 없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갑자기 왜 저러지? 마음속이 보이지 않아 계속 생각했다.
나도 눈치가 없는 ADHD라서 남들보다 더 많이 관찰하고 더 생각을 많이 해야 겨우 중간이다. 고민을 하고 또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긴장했구나! 낯선 데다가 입시를 치러야 하는 고등학교 입학이라서 얼마나 긴장되겠어!'
긴장이 풀릴 때까지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한 집이라고 느끼게 해 줘야겠다고 결심한다. 편식 좀 하면 어때.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더 잘 챙겨주자 싶다. 유독 예민해 보이는 날은 항정살을 굽는다. 가스레인지가 필요 없다.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항정살을 구우니까. 돼지고기 중엔 제일 비싸지만 가장 좋아하는 부위다.
고입을 2주 남겨놓고 결국 수학마저 그만두겠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숙제가 하도 밀려 압박감이 몇 주째 드니 마음이 힘든 모양이다. '집에서 하면 되지'라던가, '집에서 안 하면 스터디카페나 도서관에 가라고 하는 건 어때?' 따위의 말은 티라노에겐 통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안 하는 아이가, 숙제라는 걸 하러 스터디카페나 도서관까지 갈리 만무하지 않은가. 숙제한다는 핑계로 함께 가서 노닥거리고 간식을 사 먹을 친구도 없는데 말이다.
옆에서 조언해 준답시고 저렇게 말하면 내 속만 터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나 여기 왜 앉아서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하지?' 이런 생각만 든다. ADHD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건지를 그들은 알 필요조차 없을 테니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발달이 남다른 아이를 키운다는 것. 게다가 주양육자인 나 역시 같은 발달 문제를 가졌다는 것. 이건 비슷한 상황에 놓여 본 사람만 알 수 있겠지. 그간 오래된 친구들에게 받은, 이해와 공감을 받지 못한다는 서러움이 또다시 몰려온다.
방학이라서 학교를 안 가서 힘들게 들어간, 하나 남은 수학학원 중단 위기가 왔다.
'어쩌지? 개학까지 2주, 어떻게 버티게 하지?'
궁리가 다시 시작됐다.
'수학만큼은 절대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 남은 수학을 지키려면 새 전략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