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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남은 수학 지키기 대작전이 시작됐다.

인지적 유연성이 부족한 ADHD 아이에게 융통성이라는 동아줄을 던졌다.

by 그림크림쌤

중3 겨울방학, 티라노씨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중학교 졸업과 함께 시작된 방학, 수학숙제를 할 공간과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중3 첫 중간고사 이후 시작된 학습 무기력으로 인해 티라노 뇌에서는 공부란 '해도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그렇게 책상은 트라우마 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벌써 8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숙제할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설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 앞에 그 좋다는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해도 외출은 기 빨린다며 안 나가니까 말이다. 그런 아이가 하기 싫은 숙제를 하러 외출을 할 리가 만무했다. ADHD약은 없는 공부의지까지 생기게 해주진 않는 게 확실하다.


게다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긴장이 되는지 온 세상 히스테리를 다 모아서 부리는 듯하다. 감정기복을 잡아주기 위한 마음 읽기에 돌입하려 해도 틈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 말도 못 걸게 하면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게임을 저렇게까지 많이 하는 건 처음 본다. 친구는 온라인 친구들 뿐이니 못하게 말릴 수도 없고 큰일이다 싶다.


'말을 걸 틈이 있어야 위로든 공감이든 해줄 텐데. 어쩌지.' 평범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공들이며 애써온 2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원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평범은커녕 예전보다 더 '어딘가 남다른' 아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담당의사와 상의해 상담을 받게 해야겠다 싶었다.

소아정신과 진료날, 보호자 먼저 들어가겠노라고 요청했다. 진료실에 들어가 선생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차오른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라고 하신다. 그 말 한마디에 참았던 울음이 터지며 펑펑 울며 말한다.


"티라노가 요새 너무 예민해요. 말도 못 걸게 하고, 게임 친구들이 생긴 후론 게임도 너무 많이 해요. 이젠 정말로 게임중독 같아 보여요. 온라인 친구들 사귄 건 정말 좋지만 너무 많이 의지를 하는 것 같아요. 이러다가 혹시 저 아이들과도 틀어지게 될까 걱정이 돼요.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겨우 생긴 친구들인데, 저렇게 좋아하다가 다시 멀어지면 티라노는 어떻게 해요. 그럼 저 아이는 무너져버릴 거예요..."


"전 수학 탑반 들어가면 공부를 다시 할 줄 알았어요. 근데 공부를 다시 하기는커녕 하나 남은 수학마저 방학이라 숙제가 밀려 그만두겠다고 난리를 쳐요. 티라노 자존감 양다리가 게임과 수학인데,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면 티라노는 어떻게 살아요... 티라노가 너무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워 보여요.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이가 절벽 끝을 위태위태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보기에도 그동안은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그래도 잘 버티는 것 같아 지켜보자 싶었는데, 티라노가 지금은 불안해 보인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상담받을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도 하신다. 2주 후에 다시 설득해 볼 테니 2주 후에 오란다. 2주 만에 오라는 게 ADHD약 적응기간 이후로 처음이다.


말을 쏟아내고 벌겋게 부은 눈을 애써 참아내며 대기실로 나왔다. 무심한 척 나를 흘끔 쳐다보더니 한마디 한다. "엄마 목소리 다 들렸어." 아... 망했다. 나 우는 소리 다 들렸나 보다.



이대로 무너지게 놔둘 순 없다.

학군지에서 친구가 없어도 무시받지 않았던 비결이 수학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각의 전환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면서 '꼭 숙제를 다 해가라고 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나마 말을 한두 마디 걸었을 때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감성이 가장 풍부한 잠들기 직전을 활용해야겠다 싶었다. 눈치를 보다가 기분이 조금 나아 보이는 어느 날, "엄마 딱 한마디만 해도 될까?"라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라? 웬일로 짜증을 안 낸다. 오케이 좋았어. 지금이야 싶다.


"너 생각보다 굉장히 성실하고 착한 거 알아?

너 4살 때도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실수할까 봐 두려워서 말을 일부러 안 하는 거라고 언어치료 선생님이 그랬었거든. 아들, 입학까지 2주밖에 안 남았어. 선생님이 탑반인데도 숙제 다 못하는 애들 많다고 하셨어. 어려운 데다가 숙제양도 많으니까."


"수학학원 숙제를 다 해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 2주만 능글능글 버텨보는 거야~! 선생님이 숙제 왜 안 해왔냐고 하면, 당황하지 말고 능글능글 웃으면서 '쌤 죄송해요~ 다음엔 더 잘해 올게요!'라고 말해버려. 설마 2주 숙제 좀 밀린다고 잘리기야 하겠어? 숙제 좀 밀려도, 테스트 잘 보면 당장 잘리진 않아!"


"2주만 버티면 입학이야. 너네 학교는 아침에 자습할 시간도 50분이나 있으니 너한테 딱 맞는 학교 아니냐? 아침 자습이랑 쉬는 시간만 합쳐도 2시간이고, 점심시간까지 합치면 2시간 반이나 돼! 그럼 그 시간에만 숙제해도 밀릴 일은 없잖아. 넌 학교에서는 학습습관이 잘 잡혔으니까. 3월 돼서도 숙제가 힘들면 그때 학원 그만두어도 늦지 않아. 3월에 2주가 지나 그때도 그만두고 싶다면 엄마랑 다시 얘기해 보자."


내 제안이 나쁘지 않은지 묵묵하지만 진지하게 듣는 티라노씨였다. 다행이다. 휴. 고비를 조금 넘긴 것 같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조금은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자세를 보여주며) 자 따라 해 봐. 오늘부터 매일 3번씩 외치고 자는 거야.

숙제 다 못해도 괜찮아.
공부 못해도 괜찮아.
능글능글 2주만 버티자!
저 말을 세 번씩 외쳤다.


그렇게 2주간 매일 저 말을 세 번씩 외쳤고, 티라노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수학학원은 다행히 그만두지 않은 채 말이다. 저 말들을 외치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긴 되나 보다. 큰 남자아이가 하란다고 매일같이 따라 한다. 어떤 날은 '하, 내가 이거 왜 하고 있지?'라고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러니 키가 아빠보다 커졌어도 티라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티라노에게

티라노씨, 넌 존재자체만으로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그걸 항상 잊지 마. 늘 T다운 유쾌한 말로 엄마를 웃겨줘서 고마워. 네가 웃길 때 나오는 행복 호르몬들 덕분에 엄마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어.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엄마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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