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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등학교 입학 후 첫 모의고사를 봤다.

by 그림크림쌤

어차피 꼴찌 하는 거 학군지 가서 꼴찌 하면 지금보다는 낫겠지!

02화 알고보니 ADHD였던 꼴찌 초딩, 학군지에 입성하다.에서 내가 쓴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OO고 보내자' 맘먹고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6년, 정말로 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올해부터 도입된 고교학점제와 수능 개편이라는 이슈로 미달이 난 덕분에 다른 학교에 배정되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다. E가 많아서 사실은 인문계고 자체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던 터라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사립이라 그런가 학군지라 그런가, 내가 아는 고등학교 시스템과 너무 다르다.

인문계여도 보통은 8시 30분에서 40분 사이에 등교하는데 여긴 이상하다. 이 동네 다른 학교들은 다 8시 등교인데, 이 학교만 7시 30분 등교랜다. 심지어 고3땐 7시 등교고. 나도 이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내가 다니던 20여 년 전에도 고2까지는 8시 등교였다.


중학교 때 8시 30분 등교일 때에도 겨우 겨우 초치기하며 등교한 아이다. 근데 등교시간이 무려 한 시간이나 당겨졌다. 이제 때려치울 게 몇 개 안 남았기에, 이른 등교시간 때문에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할까 봐 또다시 불안이 몰려온다.


눈치를 보다가 말한다. "엄마도 OO고 등교가 이렇게 이른 줄 정말 몰랐어."

"앞으로 1시간 더 일찍 자야겠다. 우리 둘 다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

"......"

다행히 진상을 부리진 않는다. 휴. 다행이다 싶다. 자식이 상전이다. 근데 티라노는 ADHD라서 금쪽이니 더 높은 상전이다. 염라대왕 정도 되려나? 자칫 마음 읽기 놓쳐서 감정 기복 못 잡아 주면 더 큰 폭풍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아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말도 못 걸게 한다. 티라노와 '진짜 친밀한' 엄마가 되기 위해 애써온 몇 년의 시간이 무색하다. '안 그래도 ADHD라 감각이 예민한 아이가 낯선 환경에 노출되니 얼마나 긴장될까' 눈치만 점점 는다. 이젠 얼굴 표정만 봐도 말을 몇 마디까지 건네는 게 가능한지 견적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한마디 밖에 못하겠네' 싶으면 하고 싶었던 부탁이나 마음 읽기를 얼른 던져버린다.

"아들~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어!"

"응. 알겠으니까 말 걸지 마."

'앗. 오늘 말 걸기 끝인 건가. 하하.'

이런 식이다.



3월 26일, '3모'라고 부르는 인생 첫 모의고사가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전국연합학력평가'지만 사실상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 치르는 전국 단위 시험이다. 이 성적이 결국 수능까지 간다는 무서운 말도 있다. 모의고사 준비? 당연히 할 리가 없다. 학교시험도 때려치운 지 열 달이 되어 가는데 모의고사 공부는 무슨. 하하하. 모의고사 준비는커녕 수행평가 준비도 전혀 안 해도 이제 암시롱도 안 한다.


시험 전날 일찍 자자며 스몰 토크를 시도한다.

"아들, 잠을 잘 자야 실수가 주는 거 네가 잘 알잖아. 일찍 자는 게 어때?"

잠을 푹 못 자면 ADHD약을 먹어도 약효가 줄어든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그래서 그런가 금세 수긍한다.

"3월 모의고사 결과로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널 평가하게 되거든. 이걸로 자율학습 좌석도 정하고, 많은 것들을 이 성적으로 정해. 그러니까 내일 수학 이외의 과목들도 열심히 풀어야 해. 알았지?"


다음 날, 혹시 찌그러진 시험지라도 있나 싶어 아들 가방을 오늘도 뒤적거린다.

오잉? 모의고사 시험지와 답안지가 있다! 살짝 보니 수학만 채점하고 다른 과목들은 채점도 안 했다. 수학은 또 80점대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놈의 90점! 중학교 내내 넘기 참 힘들었던, 높은 성벽 같던 점수. (티라노는 중학교 내내 딱 한번 넘어봤다.)


"티라노야. 혹시 수학 말고 다른 과목들 엄마가 채점해도 될까?"

눈치 보며 슬쩍 물었더니, 몇 초간 침묵하다 대답한다.

"알아서 해."

"응. 고마워!"

마음이 바뀔세라 시험지를 들고 안방으로 도망친다. 침대 위에 작은 테이블을 올려놓고 채점을 시작했다.

'슥~~ 쓱~~ 쓱~~ 쓱! 쓱! 쓱~~ 쓱!'

아이고, 색연필 없나? 볼펜 소리가 요란해 온 집안에 울려 퍼진다. 채점 소리의 길이만 들어도 동그라미인지 빗금인지 다 알겠네. 달려와서 채점 그만하라고 난리 칠까 봐 눈치가 보인다.


어라? 근데 국어 웬일이야? 생각보다 반타작은 넘었잖아! 수학 빼곤 다 찍을 줄 알았더니 전 과목 다 열심히 풀었나 보다. 오후 5시가 넘도록 하루 종일 시험을 본 건 태어나 처음인데, 졸거나 찍지 않고 열심히 풀어준 게 너무 고맙고 대견하다. 그렇게 다른 과목들도 전부 채점했다. 등급컷 언제 나오나 초조한 마음으로 네이버 카페를 들락거린다.


드디어 등급 예상컷이 발표됐다. 두둥!

수학 90점도 못 넘었는데, 1등급이랜다. 뿌앵 너무 기쁘다. 새로 들어간 수학학원을 그만두네 마네 난리 치던 게 불과 3주 전이라서, 만감이 교차한다. 국어, 한국사, 영어.. 예상대로 등급이 난리가 났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예상 등급컷을 보다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오잉?? 1등급이 한 과목 더 있네??'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티라노에게 달려가 소리친다.

"티라노~ 너 사회 왜 1등급이야?? 게다가 과학도 2등급 나왔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티라노도 놀랐는지 눈이 커다래진다. 가장 궁금한 걸 묻는다. (참고로 내신과 달리 모의고사는 여전히 9등급제가 적용된다.)


"너 중3 때 사회 시간에 수업 열심히 들었던 거야? 3학년 때 수업 하나도 안 듣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참고로 사회는 중3 때 배웠는데, 시험 없이 수행평가만 봤었다.)

"그게, 사회 선생님이 무서운 데다 필기를 안 하면 포트폴리오 감점한대서 수업을 들었었어."

역시 ADHD아이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힘이 길러질 때까지는 조력이 꼭 필요하다는 걸 또 느낀다.


가장 기쁜 건 사실 과학 등급이었다. 왜냐하면 중3 첫 중간고사 때 과학을 한 달 내내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60점대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학군지에 괜히 이사 와서 아이에게 좌절감과 상처만 안겨준 건가 싶어서 작년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후회하다가도 수학실력 오르는 걸 보면 '그래도 오길 잘 하긴 했지' 싶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게다가 혼자 공부한 것도 아니고, 중학교 과학교사 엄마인 나와 함께 공부했다. 시험에 이거 무조건 나온다며 엄마만 믿으라며 말이다. 그때 지구과학은 거의 다 맞은 반면, 물리는 거의 다 틀렸었다. 근데 세상에나. 3월 모의고사에서 물리는 전부 다 맞았다. 이놈의 중학교 과학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새삼 또 느낀다. 이 학교 과학 시험지만 보다가 3월 모의고사 시험지를 보니 '뭐야. 생각보다 쉽잖아.'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의외의 성적을 받아 기분이 좋은지 마음이 열렸다. 이번 기회 놓칠 수 없다.

지금이다 싶어 얼른 자존감 올리기에 돌입한다.

"거봐, 엄마가 뭐랬어. 네가 힘들게 공부한 건 어디 안 가고 다 네 안에 쌓여 있는 거라고 했잖아."

"과학 봐봐. 너 열심히 했지만 거의 다 틀렸었던 물리 다 맞았잖아. 반면 공부 안 하던 시기에 배운 화학은 몇 개 틀렸잖아."


마음 어루만져주기는 끝났으니까 본 교육에 돌입한다.

티라노야,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라. 보통 평균을 40~50점대로 잡아. 근데 OO 고는 평균이 더 낮대. 너 다닌 중학교보다 성적 더 안 나올 거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해. 만약 네가 열심히 했는데 40점대를 맞아도 좌절할 필요 없어. 반에서 중간은 한 거니까! 고등학교에서 중간하기가 어디 쉽냐? 아들, 지금만큼만 해. 엄마는 더 바라지 않아. 반등수나 원점수 신경 쓰지 마. 수업 듣고 공부하는 건 네 저력을 쌓는 과정인 거야. 네가 대학을 가던 게임 개발자가 되던, 뭘 하던 말이야."

기분이 좋으니 길게 말해도 다 들어준다. 이런 대화, 오랜만이다.


긴 얘기를 다 들어주더니 한마디 한다.

"나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어찌나 환하게 웃으며 해맑은 표정을 짓던지. 그래, 저 표정! ADHD다운, 사랑스럽고 순수한 저 표정. 기분 좋으면 아무 이유 없이 팔을 흔들거리며 걸어가는 티라노씨의 과잉행동. 나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지. 엉망진창으로 다 망한 줄 알았던 티라노씨의 공부 인생, 이제 진짜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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