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존칭으로 쓰겠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참기 힘든 날입니다.
갓반고 입학 후 첫 중간고사. 결국 시험기간까지 교과서를 단 한 권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마지막 과학 시험을 앞두고, 며칠 내내 꾹 참았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가 슬프다는 핑계를 대어 참았던 눈물을 조금은 마음 놓고 흘려봅니다. 전 절대로 티라노씨 때문에 우는 게 아닙니다. 전 불안을 들키지 않는 담대한 엄마니까요. 단지 아이유 님 연기가 너무 뛰어나 감정이입이 잘 되어 눈물이 나는 것뿐입니다.
내일은 시험 마지막 날, 제 전공인 과학 시험입니다.
'약물치료로도 내적 동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는 ADHD 아이에게 외적 동기라도 부여해 보자!'
또다시 미친 제안을 해 봅니다. 이판사판, 교사가 돼가지고 궁지에 몰리니 별 제안을 다합니다.
"과학 교과서 본문을 읽기만 해도 용돈을 줄게. 만약 교과서에 있는 문제까지 푼다면 더 주고!"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하며 제안합니다. "나 교과서 안 가져왔는데."랍니다. "엄마가 교사용 교과서 출력해 놓았어!" 이 말을 마치자마자 도파민이 폭발했나 봅니다. 순간적으로 눈이 반짝거리며 동그래집니다. 그렇게 티라노 씨는 책상에 앉았습니다.
돈을 주고 꿈같은 희망을 샀습니다.
책상에 앉는 것이 화산폭발 같다던 두려움도, 전두엽 부재로 인한 귀차니즘도 극복하고 책상에 오랜만에 앉아있던 모습을 보아 행복했습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잠깐입니다. 20분 만에 다 읽었다며 나온 아이를 보고는 당황하며 더 공부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랬더니 압박감과 죄책감에 순식간에 사로잡히나 봅니다. 하, 내일 과학시험입니다. 고등학교 근무경력도 7년이나 되니 제 나와바리, 잘 찍어줄 수 있으니 더 애간장이 탑니다. 그래서 또 실수했습니다. 베테랑 교사면 뭐 합니까, 나 스스로 감정조절도 잘 안 되는 중증 ADHD인 엄마가 바로 저입니다. 이런 제가 제 아이 감정파악과 조절 훈련한다며 늘 애쓰고 노력합니다. 제 달란트는 노력이니까요.
지레 미안했는지 제게 한소리 합니다. 시험 전날 이렇게 읽는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 테니 다시는 이런 제안을 하지 말랍니다. 아차 싶은 전 조금 후 말합니다.
"부모라면 아무 이유 없이 내 자식에게 용돈을 줄 수도 있는 거야. 그간 적게 받아 온 밀린 용돈을 받은 거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리고 지난 설에 폭설로 못 내려가서 세뱃돈 많이 못 받았잖아. 그걸 대신 받은 셈이라고 생각해도 되잖아."
"아 그렇네."라고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읽힙니다. 안심시켜 다행입니다. 몇 년간 했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습니다.
다행히 수학은 잘 보았습니다.
맞아야 할 문제를 전부 맞았고, 틀리라고 낸 문제들에서 옳게 틀려주었으니까요. 심지어 틀리라고 낸 문제들도 꽤 맞혔습니다. ADHD로 실수를 하지 않고 제 실력발휘를 잘해주었습니다. 이 점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기특한지 모릅니다.
게다가 과학 시험, 서술형 3문제 중 2개나 맞추어 깜짝 놀랍니다. 말해주니 본인도 놀랍니다. "공부도 안 해놓고 어떻게 맞춘 거야?" 물으니 기분이 좋은지 말해줍니다. "한 문제는 수업 시간에 그 부분 설명할 때 들었어. 또 하나는 그냥 추리로 풀었는데 맞춘 지 몰랐어."
티라노 씨에게 담당 주치의가 한 말을 떠올립니다. "(티라노 씨 나중에) 하긴 할 거예요. 근데 고생 좀 할 거예요." 제게 해주신 말도 함께 떠올립니다. "지금 나이에 새로 뭘 시작해도 다 해낼 수 있는 지능을 가졌어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임을 알면서도 이 두 말이 힘들 때마다 위로가 많이 됩니다.
저 아이가 자기 만의 속도로 잘 헤쳐나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론 알면서 자꾸만 더 욕심이 차올라 주체가 안되곤 합니다. 때론 공부머리마저 없었다면 차라리 좋았겠다 말도 안 되는 원망도 해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소아정신과에서 청천벽력 같던 IQ 89 진단을 받은 ADHD 저 아이에게도 달란트가 분명 있다는 걸 말입니다.
절망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다시 절망이 되기도 합니다. ADHD를 끌어안은 채 살아온 교사이자 엄마인 전 저를 닮아 ADHD 인생을 살아오기 시작한 이 아이에게서 저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