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공부 때려치운 거 대놓고 밀어줘보자. 혹시 알아? 진짜 게임개발자 될지'
부모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주관이 확고해 말을 듣지 않는, '사춘기 + ADHD + 아들' 고집 3종세트를 전부 갖춘 티라노였기에, 자포자기하는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을 품은 채 작년 언젠가 게임 전용 데스크톱을 사주었었다.
데스크톱을 주문하자마자 컴퓨터 책상 주문을 위해 인터넷 쇼핑몰을 보았지만, 가구를 인터넷으로 사려니 내구성이 걱정되고 댓글도 협찬이 많으니 믿을 수가 없다. 상의 끝에 매장에 가서 직접 보고 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주문한 컴퓨터와 부품들이 벌써 와버렸다.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저걸 책상 위에 둘 순 없었다. 컴퓨터 책상 사 오면 설치하자고 했더니 티라노 씨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난리다. 컴퓨터 책상 살 때까지 우선 책상에 두면 되지 않냐고 제안한다. '하긴. 어차피 저기에 앉아서 공부 안 한 지도 오래됐으니, 잠깐은 괜찮겠지.' 싶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할 책상은 게임용 컴퓨터로 꽉 찼다. '이렇게 컴퓨터가 빨리 올 줄 알았으면 책상 먼저 살걸!' 이제와서 후회가 된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방이 작아서 옷장을 빼지 않고는 컴퓨터 책상이 들어갈 자리가 도저히 없다는 것이었다. 컴퓨터를 주문하기 전에 재봤어야 했는데 덜컥 사주기로 정하고 주문을 해버린 나도 ADHD라 그런가. 하여간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 뭘 하기로 결정하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기니까!
나의 충동성 때문에 티라노 머릿속엔 공부 책상은 게임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옷장을 다른 방으로 빼자고 했더니 질색을 한다. 큰일이다 어쩌지? 이대로는 안되는데. 고민을 시작한다.
'안 되겠다, 방구조부터 바꿔야 해!'
책상은 게임하는 곳이라는 생각부터 바꾸어야겠다 싶었다. 작은 방에 어떻게 하면 책상 하나를 더 넣지? 줄자를 들고 이리저리 재며 분석하고 연구하길 꼬박 이틀. '어라? 침대 위치를 옮기면 옷장을 안 빼도 가능하다!' 앞뒤 안재고 컴퓨터부터 샀던 ADHD의 놀라운 추진력, 이번에도 발휘한다.
방법을 찾아 신이 나 도파민이 터졌나 보다. 양팔을 흔들며 남편을 붙잡고 쫑알쫑알 어떻게 방법을 찾게 된 건지 긴 얘기를 늘어놓는다. 이놈의 과잉행동과 언어충동. 그래도 남편은 내가 ADHD라 그 모습이 귀엽단다.
얘기를 늘어놓고는 티라노 씨까지 설득해 본다. 집 밖에 한 발짝도 안 나가려는 '사춘기 + ADHD + 극 I' 티라노와 함께 외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네 책상이니까 네가 골라야지. 엄마 아빠 맘대로 고르긴 좀 그렇지 않아?"라며 자율성에 힘을 주는 척하며 꼬셔본다. 어라? 설득이 통했다. 한숨을 쉬며 알겠단다. 그 길로 우리는 다 함께 이케아에 달려가 게임용 책상과 의자를 고른다.
대형 마트에 책상을 사러 간 우리는 쏟아지는 시각과 청각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대형 마트만 오면 늘 이런다. 분명 신기한 물건도 많고 재밌는 데다 티라노도 함께 와서 행복한데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옆을 보니 티라노도 기가 빨리는지 빨리 사고 가자며 구경도 못하게 한다. 숨을 깊게 내쉬며 마인드 컨트롤을 해본다. 남편은 내가 걱정되는지 옆에서 양손으로 내 귀를 막아주기도 한다. 우영우가 따로 없다.
그렇게 공황장애가 올 것 같은 힘듦을 참아가며 게임용 책상과 의자, 소품을 골라본다. 신이 나는지 이 책상 저 책상을 둘러보고, 여기저기 앉아본다. 정말 신중하고 진지한데 그 모습이 또 귀엽고 사랑스럽다. 티라노씨 오늘 분명 약 먹었는데, 안 먹은 날처럼 ADHD다운 본연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튀어나온다.
신이 나서 도파민이 터졌나 보다. 조립도 뚝딱이다.
가장 좋은 건 컴퓨터 책상을 다른 방이나 거실로 분리해 공간을 완벽히 분리하는 것이다. 티라노가 초등학생이었다면 거실에 두자고 했을 거다. 그렇지만 티라노는 벌써 예비 고1이고, 게다가 남자였다. 다 큰 아들의 사생활 존중 문제도 있으니 컴퓨터를 거실에 둘 순 없었다. 그렇다고 남는 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은 단 하나. 방 하나를 최대한 공간을 분리해 3개로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공부 공간과 게임 공간, 그리고 수면 공간으로 말이다.
각 공간을 완벽히 분리하려면 보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 좋다고 한다. 특히 침대에 누웠을 때 공부 책상이 보이는 건 주의력 전환이 어려운 ADHD 아이에게는 더욱 안 좋다고도 한다. 공부할 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컴퓨터책상과 침대가 안 보여야 한다. 컴퓨터 할 땐, 스트레스를 충분히 풀며 쉴 수 있도록 공부 책상이 안 보여야 한다. '잘 땐, 다 잊고 숙면할 수 있도록 옷장으로 시야를 막아 아늑한 느낌을 주면 어떨까?' 이렇게 방 구조를 바꾸어보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부 책상에 앉으면 컴퓨터 책상이 신경 쓰인다는 점이었다.
나와 티라노 씨 둘 다 ADHD니, 내가 앉아 테스트했다. 공부 좀 했다는 내가 앉아보아도 컴퓨터 책상이 자꾸만 거슬린다. '안 되겠다. 칸막이를 사야겠어!' 인터넷 쇼핑몰 여기저기를 찾아본다. 시중에 파는 칸막이 사이즈가 너무 작다. 어쩌지?
다이소에서의 칸막이 구입을 실패한 후, 대형 문구점에 가서 사장님께 의견을 여쭈어본다.
"아들 책상 옆에 칸막이를 세우고 싶은데 시중에 파는 건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요. 혹시 뭐 적당한 거 없을까요?"
감사하게도 구석구석 다니시며 함께 고민해 주신다. 그러다가 우린 폼보드를 발견한다. '이거다! 크고 두꺼우면서 단단한 재질!' 그렇게 커다란 폼보드를 희망을 품고 집까지 모시고 와 3단 책꽂이 옆에 붙이니 잘 세워진다. 흠. 역시 내가 ADHD라서 아이디어가 많고 창의적이긴 해! 자화자찬도 해본다.
폼보드로 대형 칸막이를 만든 후 앉아보니 제대로다! 독서실이 따로 없다. 정말로 컴퓨터 책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창밖을 봐도 보이는 게 별로 없어 그다지 신경이 거슬리지 않아 이것도 합격이다. 뻥뚤린 창문 앞이라 햇빛도 받을 수 있으니 공부하려고 앉기만 하면 세로토닌 충전도 돼 기분도 좋아지겠다 싶다.
책상 앞 벽에 붙여놨던 내가 그려준 그림들과 가정통신문 따위들도 전부 치워버렸다. 책상 왼쪽 벽에 있던 잡동사니들도 전부 안 보이는 뒤쪽으로 옮겼다. 책상 위에는 펜꽃이 조차 놓지 말자. 이것저것 구경하고 치우다 시간 다 보내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말이다. 흠. 완벽하다. 앉을 마음만 먹으면 예전보다 집중이 훨씬 잘 되겠다 싶어 신이 난다.
그렇게 절망은 다시 희망이 되어 마음에 차오른다. 내적 동기가 생기지 않는 ADHD 아이, 마음먹을 그날을 기다려주어 보기로 한다. 잔소리를 다 끊으니 오히려 수학 실력이 올라갔다. 이 정도 공부 저력이면 뭘 해도 해낼 아이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ADHD니까 더 잘할 거다. ADHD? 인생이 조금은 외로워서 그렇지 오히려 좋다! 내가 산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