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근성 Jan 14. 2021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태국 two.

travelog ㅡ 방콕, 2017



방콕, 2017년 10월 3일
14:55 at Wat Chana Songkhram


태국의 우기를 실감한 오후

아침 일찍 카오산 로드에 가 짐을 맡겼다. 주변을 정처 없이 산책하다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까만 가면을 멋지게 쓴 녀석인데 경계가 심하다. 자세를 낮추고 손을 들이밀었더니 킁킁 냄새를 맡고는 제 발을 내민다. 결국 몇 대를 얻어맞고 말았다.



카오산 로드의 왓 차나 송크람은 본래 예정에 없었던 장소다. 돌아가기 아쉬워 무턱대고 들렀는데, 예상보다 훨씬 대단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처마 끝이나 창문을 감싼 금색 장식이 그렇다. 내부로 들어서면 거대한 불상 앞에 꿇어앉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는 그에게 배운 대로 세 번 절을 하고 웅장한 광경을 마주봤다.



고요한 가운데 어느새 빗소리가 들렸다. 폭우의 시작이었다.




16:40 at Ayutthaya


아유타야 투어에서 돌아온 뒤

인상 좋은 가이드를 만났다. 닉네임이 '조아'란다. 한국어를 제법 하는데, 알고 보니 관광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어학당을 다녔다고 한다. 가는 길에 조아는 태국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했다.

우선 태국에는 총 4개의 왕조가 있었고, 현재의 국왕은 라마 10세이며 작년 세상을 떠난 라마 9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했다(총 70년). 그동안 그는 대단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국왕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년 동안이나 국상을 치르고, 그를 위한 기도를 하는 거겠지.

새삼 태국의 국민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타국민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왓 마하탓은 그 유명한 불상 머리와 보리수 나무가 있는 곳이다. 그곳의 불상은 전부 몸통만 있는데, 근처의 불상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를 우연히 나무가 감싸며 자라 자연스레 보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 치고는 굉장하다. 나무에 뒤통수가 파묻힌 머리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그곳에 깃들어 있었다. 마치 모든 역사를 지켜보면서도 자연처럼 침묵하듯.

아유타야 투어의 마지막은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일몰을 본 일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카메라를 쓰지 못해 거의 눈으로만 감상했다. 노력은 했지만 아마 눈보다 더 나은 촬영 기구는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 위로 번지는 진분홍빛 구름이나 어스름한 달빛까지 흉내낼 수는 있어도, 눈은 분위기를 담지 않나. 그것을 최대한 오래 기억하는 것이 내게 남은 숙제다.




방콕, 2017년 10월 4일
18:07 at Damnoen Saduak Floating Market


일기예보는 오늘도 좋지 않다. 종잡을 수 없는 태국의 우기는 종종 예기치 못한 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전부 내가 원한 곳이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간 것들이 실망스러운 때도 있었다.

기대가 큰 탓인지, 아니면 의외로 내가 충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비가 무더위를 식혔고, 혼자 훌쩍 떠난 이번 여행의 어떤 묘미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수상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현대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전혀 없었다. 대신 나무로 만든 가옥과 열대 지방 특유의 나무가 늘어서 있다. 작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물가에는 약간 흐린 하늘이 비친다. 거울 같다. 순간 이름 모를 이 동네의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시장에 도착해 자유롭게 주변을 둘러봤다. 뱃사공과 관광객들이 낸 소리가 어지럽게 얽힌 가운데 물살은 고요하다.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혼란을 생각했다. 그것은 오직 내 안에만 있는 것이다. 아무런 욕심도 꿈도 없는 물결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다.



투어에 포함된 배를 타고 쾌속으로 달리는 동안 나는 최대한 그곳의 삶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정글 같은 나무와 수상 가옥이 자연스레 얽힌 그곳에 다시 한 번 갈 수 있다면 그때는 오래 머물고 싶다.


버스를 타고 돈므앙 공항으로 간다. 치앙마이에 가기 위해서다.

치앙마이에서의 여행은 어떨까.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혹 비가 오더라도, 계획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게 되더라도 속상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말 그대로 나는 여행객이고, 이곳의 시간들은 내 일상이 아니니까. 나는 남은 며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후회는 명백한 낭비고, 우리는 시간을 마음껏 낭비하기엔 너무도 짧은 삶을 산다.




치앙마이, 2017년 10월 5일
09:16 at Tha Phae Gate


치앙마이의 아침

호텔 라운지에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완벽하게 조리된 반숙과 신선한 과일, 볶음밥 같은 것들이다. 본래 아침을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후 3시에 끝이 나는 짚라인을 타려면 든든히 먹어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겠지.

 식사를 마치고 나서자 타이밍 좋게 픽업 직원이 왔다.



치앙마이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동네다. 어디를 봐도 나무와 풀이 가득하고 그것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난다. 멀리 보이는 푸른 산등성이는 구름에 삼켜져 흐릿하다. 정처 없이 떠돈대도 마냥 좋을 것 같다. 맑은 아침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사람들도 나와 같은 감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18:45 at Nimmanhaemin


혼자 하는 여행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이따금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나 소외감이 들 때가 있다.

문득 작년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 여행이 생각났다. 본래 타지로 나서면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던 것들이 가장 그리워지는 법이다. 내게 그것은 언제나 당연했던 가족,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님만해민을 걷다 마야 쇼핑몰 앞에서 썽태우를 잡아 탔다. 도이수텝으로 가기 위해서다. 왕복 800B. 비싼 감이 있지만 치앙마이에서의 짧은 시간을 낭비하기가 싫었다.




19:30 at Doi Suthep


용의 비늘이 섬세하게 조각된 계단을 오르며 나는 꽃 두 송이를 가지런히 들었다. 상인에게 왜 두 송이냐 물었더니 위에 부처가 두 분 계시단다. 해가 일찍 져 캄캄한 가운데 산을 오르니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도이수텝은 금빛의 향연이다. 거대한 금탑 주위로 수많은 불상들이 늘어서 있다. 나는 꽃과 향을 바친 뒤 절을 하고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흰 옷을 맞춰입고 앉아 그들의 믿음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외풍에 흔들리는 일도 적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1:30 at Doi Suthep (휴대폰 사진)


비가 와 원래 가려던 전망대에 가지 못했다. 산중이라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데다, 몸이 점점 젖어 무섭기까지 했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에 미끄러져 휴대폰이 긁혔는데, 고생한 보람도 없이 전망대의 문은 잠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썽태우를 타고 내려오던 중에 기사가 중턱의 야경 스팟에 나를 내려주었다. 완전히 포기했던 광경을 보게 되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먼저 나왔다.

나를 힘들게 했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위로처럼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었다. 사람이라곤 오직 나뿐인 공간에 비에 젖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오묘한 빛을 발하는 구름 뒤로 완전한 보름달이 떴고, 건물과 공항, 민가가 한데 모여 굉장한 야경이 되었다.

산 위에서 만나는 야경이란 고층 빌딩의 전망대 따위와 비할 바가 못 된다. 나는 그것에 매료되어서, 오히려 오늘 비가 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2:45 at Night Bazaar (휴대폰 사진)


도이수텝에서 내려와 곧장 창푸악 게이트로 갔다. 추천받은 재즈 바에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급히 다른 곳을 검색하다 우연히 한국인 둘을 만났다. (내 휴대폰에 뜬 네이버 검색창을 보고 알았단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다만 타국에서의 우연한 만남 중 그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기쁘다.

 빠이에서 왔다고 말한 그들은 내게 다른 곳으로 함께 갈 것을 권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섰다.


 


나이트 바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0시 반이었다. 대충 구경하면서 허기를 달랠까 했는데, 얼마 걷기도 전에 끌리는 장소를 발견했다. '하드 록 카페'. 이름과 달리 팝을 위주로 연주하는 라이브 밴드가 있는 곳이다. 가격은 다소 비쌌으나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비록 원하던 재즈 바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매번 그랬듯 이곳은 내게 실망만을 주지는 않는다.




치앙마이, 2017년 10월 6일
07:32 at Chiang Mai International Airport


곧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뜬다. 나는 방콕으로 가 아침을 먹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7일간의 여행이 무척 짧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곳이 겨우 일주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쉬울 때 떠나야 하는 법. 남은 것은 다음을 기약하고 이제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안녕, 태국.






방콕 숙소 근처.
짜뚜짝 시장의 어느 가게.
라마 1세의 동상을 보러 가던 길에.
카오산 로드 근처의 골목.
아유타야 투어 중.
더위에 지친 개 두 마리. 다가가도 깨지 않는다.
아속역 근처의 지하 마켓에서. '그'에게 물어봤더니, 노란 것은 단 맛이 나는 과일이라고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태국 on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