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가 된 여자

2023 아르코 문학창작 기금 (발표지원 : 수필 분야) 선정작

솟대가 된 여자


이른 봄의 촉이 언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엑스트라들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온 마을을 휘감아 돌았다. 전통 사극 분장을 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달리던 흰옷 입은 엑스트라들이 한 무리의 새처럼 보였다. 가파른 골목길에서 어머니는 자주 숨이 차올랐고 걷다 쉬기를 반복하셨다. 솟대 장인의 집 담장에 기대 서 있는 어머니 얼굴 위로 겨울을 품은 바람과 햇살 한 조각이 내려앉았다. 지붕 위에는 아직 못다 한 인연에 묶여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나무새들의 부질없는 파닥거림이 있었다. 담장과 어머니와 지붕 위의 솟대들. 새들이 어머니의 여윈 몸을 끌어올려 일시에 날아가 버릴 것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새를 나무 기둥에 세워놓는 문화는 바이칼, 몽골,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솟대 위의 새들은 영혼의 전달자로서 조상들의 영혼에 가 닿기를 바라는 염원을 품고 있으며 장승처럼 마을 수호신의 상징이거나, 성역의 상징 또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솟대 위의 새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오리를 쓴다고 한다. 오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로 하늘, 땅, 물 모두를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고 다산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모든 어미는 아이들의 솟대다. 아이의 염원이 어미의 몸을 타고 하늘에 이를 때까지 어미들은 염원을 품은 고통과 아픔의 사다리가 된다. 집안의 안녕과 풍요를 위한 솟대의 여인들은 집안의 상징이 되거나, 자식들의 꿈을 향한 이정표가 된다.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길과 사람의 염원이 하늘로 이르는 길 사이에서 중간자인 새들은 날아야 하는 당위와 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기다란 나무 막대기에 잠시 매어두었다. 하늘과 땅의 중간자 역할이 끝나기 전에 날아서는 안 된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새들, 그래도 언젠가는 지붕을 뚫고 하늘로 오르고 말 것 같은 한 무리의 새들은 제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신호가 떨어지면 일제히 날아오를 것만 같은 솟대 위의 새들은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솟대를 배경으로 서있던 어머니도 섬에서 뭍으로 그리고 머지않아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 중이었는지 모른다.


새하얀 상복 치마 속으로 매운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고택 너른 마당에 유족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안채에서 입관 의식이 진행되고 있고 한겨울의 냉기와 죽음의 냉기가 뒤섞여있었다. 중첩된 흐느낌 속에 유독 어머니의 흐느낌이 귀를 파고들어 왔다.

“왜, 나를 그리로 시집보냈어?”

이미 너머의 세계로 건너간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뒤늦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과년한 딸로 빚을 대신하기도 했던 시대였다. 어머니는 섬초처럼 눌러앉아 지극히 당연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되돌이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풍파가 많은 섬살이에서 ‘적당함’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쉼 없이 날고, 달리고, 헤엄쳐야 했다. ‘적당함’을 유지하기 위한 물 아래의 맹렬한 헤엄질을 생각하면 적당한 삶이나 적당한 죽음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의 솟대로 혹은 자신의 솟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다. 집안의 솟대가 된 어머니는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한 솟대로 살지 못하였다. 어떤 적당함의 궤도에서 겨우 숨을 들이켤 무렵, 어머니 몸 안에는 정체불명의 것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것을 ‘나이 듦’이라고 속단하고 있었다.


솟대 장인의 집 앞에서 지붕 위의 솟대와 어머니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었을 때 어쩌면 어머니는 벌써 먼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화의 방 앞에 촛불이 켜졌다. 날갯짓과 헤엄질, 달음질을 그만두라는 조용한 명령이었다. 이제 누군가의 염원이 하늘로 오르는 길이 되어주지 않아도 되었다. 병실 벽에 드리워진 사람들의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있던 평사리 지붕 위의 솟대를 떠올리게 했다. 어디를 바라보든 날아야 한다는 목적만은 분명한 솟대 위의 새들처럼 어머니 곁을 지키는 그림자들도 여러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어머니가 솟대 위의 나무새가 되지 말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되어 어디든 훨훨 날아가시기를 바랐다.


시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나는 오래전 친정어머니의 임종을 떠올렸다. 어머니도 평생을 솟대로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염전을 사러 이른 새벽 바다로 달리셨던 어머니. 평생 도회 사람인 그녀는 온몸에 짠 바다 내음을 묻혀오곤 했다. 어머니 몸 안의 무엇이 어머니를 바다로 이끌었을까. 생의 소금이 필요했던 것일까. 새하얀 소금 알갱이에 푸른 바다와 도요새의 발자국과 바다의 노랫소리라도 담아야 했던 것일까. 중환자실 모니터에 명징한 선이 그어지는 것을 신호로 어머니는 솟대에서 벗어나 바닷새가 되어 소금꽃 피는 염전 위로 거침없이 날아갔다.


‘어머니’라 불린 여인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왜 유독 솟대의 새를 떠올리는 것일까. 날고 싶었으나 날지 못하던, 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여인들. 지주목 위의 새로 누군가의 염원을 끝없이 날개에 올려놓아야만 했던 여인들, 너머의 세계로 그녀들을 인도한 것은 분명 새가 아니었을까. 잉카인들에게 있어 바람의 새 콘도르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싣고 불멸의 세계로 데려가듯 한때 지상에서 '어머니'라 불린 여인들은 솟대를 벗어나 새가 되어 너머의 세계로 날아갔으리라.


여인이고 어머니인 나도 솟대가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였다지만 ‘어머니’가 되는 일은 늘 두렵고 버겁다. 어울리지 않는 큰 옷을 입은 아이처럼, 여전히 내 어린 몸은 ‘어머니’란 옷과 겉돌고 있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은 후 누군가의 솟대로 살기 위해 내 안에 있었을지도 모를 날개들을 슬그머니 접어버렸다.

어쩌면 솟대 위의 오리가 아닌 콘도르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를 시어머니와 바닷새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싶었던 친정어머니, 희생과 헌신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솟대 위의 삶을 살았던 그녀들, 가슴 깊숙이 숨겨져 있던 날개가 너머의 세상에서는 돋아났으리라. 콘도르든 도요새든 오리든, 솟대를 벗어난 새는 진정 자유롭다.


내 안의 솟대를 상상한다. 기다란 지주목이 하나 있고 그 위에 웅크린 새가 있다. 그 작고 어리고 연약한 새는 아직 누군가의 솟대가 되어주지도 못하고 자신을 위한 솟대가 되지도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중간자,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의 대지와 이상을 품은 하늘 사이 누군가의 염원이 쉼 없이 몸을 타고 오르기를, 자신의 염원 또한 더불어 오르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삶의 마지막 날이 오면 그 새의 날개를 빌려, 아니면 그 새가 되어 날아가기를 꿈꾼다. 오리일지, 콘도르일지, 앨버트로스일지, 비둘기일지, 도요새일지 모르지만, 푸른 영혼을 싣고 회한 없이 날 수 있는 날개만 있다면 그 어떤 새여도 좋다.

신이 만든 인생 무대에서 날마다 제 몫의 연기를 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은 모두 솟대 위의 새다. 생의 ‘적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날갯짓을 반복한다. 흰옷 입은 무명 엑스트라들의 외침이 하늘을 가를 때 저마다 솟대 위의 새들도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었으리라. 외침이 신호가 되어 바람과 염원을 품은 새들이 일시에 나무 장대에서 벗어나 하늘을 뒤덮기를 바랐다. 지상에서 ‘어머니’라 불린 여인들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솟아오르기를 염원했다. / 려원

* < 솟대가 된 여자> 는 2023 아르코 문학창작 기금 (발표지원 : 수필) 선정작 중 하나입니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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