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힘차게 뛰어오르고 글자들은 춤을 춘다

완벽하게 쓴 맛의 글을 쓰기 위해 쓴 커피가 위장에 들어가면...

“일단 아침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스 글릭의 수상 소감이다. 얼마나 많은 커피가 그녀의 시(詩) 안으로 들어갔을까. 어쩌면 시에서 커피 향이 묻어날지 모른다. 글릭에게 시는 '삶을 잃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기 위함이다.

어떤 기억은 강렬한 후각으로 존재한다. 비 오는 날 카페 입구에서 풍기는 커피 향은 오래전 기억을 소환하게 한다. 도시 건물들이 어스름 속에 잠긴 시간, 의대에 가기 위해 반수 중이던 내게 입시학원에서의 저녁은 네모의 시간이었다. 창문으로 네모난 하늘이 보였다. 새하얀 문제지 위에 유폐된 젊음들이 있었다. 조용히 자습실을 벗어나 자판기에 ‘딸깍’ 동전을 넣는 순간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고 진한 갈색의 따뜻한 위로가 동그란 종이컵에 담겼다. 코를 대고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자 온몸으로 뜨거운 향기가 번진다.


“이런 어쩌죠? 큰일이네요. 죄송해서.”

계단을 오르는 순간 마주 내려오던 그와 부딪혔다. 샛노란 원피스에 커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티슈를 꺼내며 어린아이처럼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가끔씩 복도에서 몇 번 스치던 사람이었던 그가 내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커피가 샛노란 원피스에 진한 갈색 얼룩을 만들던 바로 그때부터였다.

“항공공학과에 갈 거예요. 언젠가는 내 손으로 비행기를 제작하고 싶어요.”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그는 긴 손가락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허공을 향해 날렸다. 그의 종이비행기가 밤하늘을 가르고 나는 식어가는 커피를 홀짝이며 마셨다. 우리는 말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종이비행기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스물의 초입에서 우리에게 미래는 아득히 멀었고 어떤 날을 기약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 같았다. 그 해 겨울 그는 항공공학과에 합격하지 못했고 나 또한 원하는 학과에 가지 못했다. 불확실하고 어수선한 시대에 젊음마저 버거웠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까만 다이얼식 전화기가 있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수화기 너머 들리는 한 청년의 목소리에 ‘음... 음...’ 어색한 헛기침을 연달아했고 나는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한 채 엉뚱한 존댓말만 하다가 어정쩡하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마침표도 찍지 못한 이별이었다.

커피 자판기 앞을 지날 때마다 샛노란 원피스와 종이비행기,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도시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우리들의 순수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가 무수히 접어 날렸던 새하얀 종이비행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와 함께 마시던 자판기 커피는 몇 잔이나 되었을까?


이른 아침 서둘러 일을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들고 나만의 테이블로 걸어가는 일은 하루를 여는 고귀한 의식이다. 뜨거운 블랙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위장 속으로 그리고 온몸 곳곳으로 스며들 때 나는 비로소 깨어난다.

스스로를 ‘문장 노동자’라 칭한 오노레 드 발자크가 평생 동안 마신 커피가 5만 잔에 달한다고 한다. 새벽 1시~8시까지 눈이 침침하고 손이 뻣뻣해질 때까지 글을 쓰고 또 썼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게 커피라고 했다.

"커피가 위장에 들어가면 아이디어는 전장에 뛰어든 육군 포병부대처럼 날렵하게 움직여 전투를 시작하지. 기억은 힘차게 뛰어오르고 전차와 탄약으로 무장한 논리의 포병이 뛰기 시작하네. 위트가 명사수의 자세로 꼿꼿이 일어서고 직유가 발기하고 종이는 잉크로 뒤덮이기 시작하지. 투쟁이 시작되고 검은 잉크의 급류로 뒤덮이는 거야.”

바로 옆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떤 커피를 마실까 고민한다. 상큼한 꽃 향기와 입안에서 느껴지는 산뜻함, 달콤함이 매력적인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진하고 풍부하며 섬세하면서 달콤한 '로부스타 우간다', 쌉쌀한 맛,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가진 '케냐 AA', 고소함과 진한 초콜릿 향, 부드러운 신맛을 가진 ‘콜롬비아 수프리모'. 커피를 소개하는 문구들이 현란하다. 모두 섞어 뜨거운 물을 부으면 달콤하고 화사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며 진하고 풍부하며 고소하고 조화로우며 부드럽고 상큼하고 완벽한 맛의 커피가 될까?

나는 커피가 주는 수많은 맛 중 ‘쓴맛’을 좋아한다. 섬세한 쓴맛, 상큼한 쓴맛, 풍부한 쓴맛, 완벽한 쓴맛, 조화로운 쓴맛, 달콤한 쓴맛,.. ‘쓰다’라는 동사는 꽤 매력적이다. 커피 맛이 ‘쓰다’와 글을 ‘쓰다’. 나는 종이 위에 '씀'이라고 적는다. 쓴 커피를 마시며 오늘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지만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 즐겁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손끝에서 꿈틀거리며 태어나는 글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어쩌면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손가락 끝에서 태어난 글은 그가 마신 5만 잔의 커피가 쓴 글인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커피 맛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듯 내가 쓰는 글도 완벽하고 섬세하고 진하고 부드러우며 조화롭고 달콤하고 매력적인 글은 아니다. 지금 나는 적당히 쓴맛의 커피를 마시며 적당히 쓴맛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완벽하게 쓴맛 나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전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뜨거운 커피가 위장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커피 열매를 처음 맛본 에티오피아 산골마을 카파의 염소가 되어 푸른 들판을 달린다. 흥분한 염소들과 목동 칼디의 노래, 파란 하늘과 내리쬐는 햇살 한 줌, 쏟아지는 빗줄기, 커피 농장에서 커피콩을 따는 여인의 분주한 손길, 분쇄기 속 커피콩 부딪치는 소리들이 모두 커피 한 잔에 뒤섞여있다.

얼룩진 샛노란 원피스와 새하얀 종이비행기를 오래된 기억의 더미에서 끄집어내면 숨죽이던 기억들이 다시 힘차게 연어처럼 뛰어오르고 감성과 직유가 발기한다.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 낸 검은 글자들이 종이 위에서 일어나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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