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회색 심장의 웃음들,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

두 개의 회색 심장의 웃음들,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들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


(내가 너와 같다면 네가 나와 같다면/우리가 같은 무역풍 아래에/서 있지 않았던가?/우리는 이방인들) 타일들, 그 위에/서로 바싹 붙어있는 두 개의/회색 심장의 웃음들 /두 개의/입안 가득한 침묵들.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 「언어 창살」


중세 수도원의 면회실 창살을 언어 창살(sprachgitter)이라 부른다. 창살에 비치는 햇살은 덧없는 환영들이고 창살을 넘나드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을 읽으며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를 떠올렸다. 언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제인 정 트렌카와 정 경아가 마주한다. 덧없는 것들이 창살을 넘나들 때 심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입안 가득한 침묵을 삼키며 마침내 제인은 경아가 되고 경아는 제인이 된다.


연어는 몸의 껍질이 뜯겨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강물을 거슬러 모천으로 회귀한다. 본능에 따라 바다로 떠났고 본능에 따라 모태의 강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회귀가 본능이라면 생후 6개월 때 편도 미국행 비자를 발급받아 미네소타로 보내졌던 제인의 회귀는 몸에 새겨진 피의 언어, 정체성 때문일 것이다. 미국을 떠나던 날의 마지막 풍경은 다리, 뚜껑, 페달이 떼어진 피아노가 아기처럼 강보에 싸인 채 현관문 밖으로 들려나가는 모습이다. 분신과도 같은 피아노의 해체 그러나 절대 해체되지 않은 태생적 경아의 얼굴로 과거, 현재, 미래 딱 세 시제 밖에 없는 모국으로 귀환한다.

삶의 의미를 음악에서 찾으려 했던 제인은 독립성을 띠는 암시적 분위기의 악장들로 구성된 쁘로꼬피예프의 ‘덧없는 환영’ 스무 곡을 완성했을 때에야 비로소 피아노 치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답을 찾기 위해 음악 속으로 달아났지만 제인 앞에 놓인 삶은 해석될 수 없는 악보였다. 제인과 경아로서의 삶은 검은건반과 흰건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까?

어린 시절 나의 담임선생님은 피아노 음계를 외우고 악보를 연습 해오라 하셨다. 그때만 해도 집에 피아노가 있는 집은 드물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하게 만들어진 종이 건반을 사서 연습했지만 아무리 눌러도 들을 수 없는 음악, 덧없는 연주였다. 「덧없는 환영들」을 읽으며 납작한 건반 위를 오가던 내 손가락의 헛수고를 떠올렸다. 종이 피아노로 덧없는 침묵의 소리를 연주하면서 진짜 피아노 소리로 상징되던 ‘부’를 동경했다. 진짜 피아노 앞에서 누르면 쏙 아래로 들어가는 살아있는 건반의 움직임에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귓가에 분절되어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는 볼 빨개진 여자아이의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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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빠리에 산다고 다 빠리 사람은 아니다.’ 러시아에선 유럽인이고 유럽에선 러시아인이었던 쎄르게이 쁘로꼬피에프의 말이다. 진짜 호적과 고아 호적 사이에 제인이 있다. 영문 서류에는 엄마가 미혼모로 되어있었지만 진짜 호적에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한국 공사판 노동자의 다섯 번째 딸로 기록되어있다. 입양기관은 완벽하고 적법한 절차로 경아로서의 정체성을 걷어내고 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혔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제인은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인간이란 결국 어느 세계에 속해있든 이방인이며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방인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제인은 보여준다. 백인들 사이에서 늘 외로움과 허기를 느꼈지만 백인 엄마는 그 고통을 알지 못했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백인 가족을 비롯 모든 문화적 차림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네소타의 시골에서 조차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태생적인 경아의 얼굴과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모국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전신을 비춰주던 거울이 부서져 파편이 되면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없다. 제대로 볼 수 없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깨어진 조각 속의 나는 낱낱의 나다. 결코 전체가 될 수 없는.


할 수 있을 수 없음

이방인들에겐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때로는 “넌 해야만 해.”라는 말보다 폭력적이다. 가능성의 말이면서도 책임 또한 자신이 져야 한다는 점에서 ‘할 수 있음’의 강요는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더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할 수 있음’의 부정형은 ‘할 수 없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레비나스는 자아 주도성을 상실한 근원적인 무력감이라 하였다. 제인은 마크와의 결혼을 통해 아내나 어머니가 됨으로써 백인 사회에 온전히 스며들기를 바랐다. 매번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음’을 다짐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과의 마찰을 겪으며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한다.

이촌동의 잘 나가는 학원가, 아이들은 한국인이지만 이미 미국 시민권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 눈에 비친 제인은 선망의 대상이지만 현실의 제인은 끝없이 고통을 참는 법에 익숙한 한국의 소모품에 불과하다. 모국에서 제인은 오직 상품성 있는 영어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모국어를 제대로 읽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필사적으로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열어도 발화되지 않는 음절들, 구절들, 문장들은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확인이었다.



정, 우리 그리고 발견

한국인들은 ‘나의 어머니’라 하지 않고 ‘우리 어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자신과 상대방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단어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팀, 우리 동네, 사실 한국에서 ‘우리’라는 말이 붙지 않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우리가 아닌 것들’과 ‘우리인 것들’로 구분되는 현실에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배제되는 것들은 또 다른 차별이 된다. 출생에 대한 진실을 잊어야 하고 정체성을 개조해야 하는 입양인들이 진정 ‘우리’가 되는 순간은 입양인들 사이에 있을 때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것인지 스스로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입양인들은 경계에서 겉돈다. 한국인들은 제인에게 ‘우리’의 한이 깃든 아리랑을 아느냐고 묻는다. 제인은 부를 수는 없지만 아리랑의 정서를 당신들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다.

공중목욕탕에서 한국 엄마를 쏙 빼닮은 여자애들 허리 깨에 멍처럼 생긴 자국을 본다. 갈색의 임신선과 수술의 흉터들. 오직 인종적 인식의 대상으로만 배웠던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것은 제인이 한국에 남을 용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 문화를 배우면서 동, 서, 남, 북 외에 ‘중심’ 또한 하나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딘가의 중심 또한 방향이라면 제인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한국 여자가 만들고 직접 젖을 먹인 몸, 모든 생각과 감정이 비롯되는 몸, 사라지지 않는 진짜인 몸, 의심의 여지없이 경아이면서 제인이기도 한 몸, 제인은 늘 그 몸의 중심을 찾고 있다.


만일과 마주하는 불편한 진실

삶의 매 순간에 마주하는 단어 ‘만일’, 만일은 지금이라는 현실을 전복하고 싶거나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한 기대를 품을 때 사용한다. 만일 백인이었다면 돈, 섹스, 아이들 같은 결혼 생활의 일상적 갈등을 풀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이 공평한 장이라 믿으며 취미나 지적 관심을 기준으로 잘 차려진 선택지의 뷔페 앞에 있을 것이다. 또한 유치원 동급생들, 초등학교 체육교사. 수양 조부모, 스토커와 관련된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각난 기억 속, 매일 스쿨버스에서 토하던 여자애였던 제인에게 미국 엄마는 속을 가라앉히라고 박하사탕을 주었지만 왜 배가 아픈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수양 할아버지가 언니를 건드린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와 이모는 침묵했다. 입양 당시 4살 반이었던 언니는 자신이 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일찌감치 자각했노라고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단념해 버린 처절한 시간들이 언니에게 있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제인에게 트라우마는 늘 현재시제다. 여전히 밤에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악몽을 꾼다. 파멸, 실패한 결혼, 인종 차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가정의 달, 5월 입양의 날엔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입양을 홍보한다. 가끔 뉴스에서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 꽤 성공한 사람들의 기사를 보면서 입양아들은 모국에서보다 당연히 더 좋은 조건에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곤 했다. 사람들은 입양을 자비롭고 도덕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만 제인은 국제 입양은 잘 자라서 나중에 돌아오는 장기 홈스테이가 아니라 합법적 절차로 언어, 문화, 가족, 이름, 시민권, 정체성을 빼앗는 것, 한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라고 강변한다. 입양이 엄마에겐 최선이었을지 모르지만 제인에게는 최선이 아니었음을 엄마는 알지 못한다. 한국 엄마는 딸의 입을 통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면죄부를 듣고 싶어 하지만 이미 마음이 부서질 대로 부서진 사람이 하는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제인은 되묻고 싶다.


서울의 온통 빨간 것들 속, 살을 부딪고 싶다

네온 불빛 아래 매춘부의 립스틱, 정육점 고기 진열대, 신호등 정지 신호, 교회의 빨간 십자가, 이태원의 넘치는 섹스들도 빨간색, 그 반짝이는 것들 속에서 제인은 길거리 음식으로 허기를 달랜다. 불빛 가득한 서울 한복판에서 지워져 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추방된 자들의 지워진 시간들도 어쩌면 한강의 기적, 그 일부가 아니었을까.

경계와 경계 사이 수많은 문턱이 있다. 문턱은 미지의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장소이며 문턱 너머에서 다른 존재가 된다. 변신의 장소로서 문턱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늘 문턱 앞에서 머뭇거린다. 제인은 쉽게 문턱을 넘어 알게 된 지 일주일도 안 된 애인의 집에 둥지를 튼다. 지속적이고 깊숙한 관계를 원하지만 영원한 계약이나 맹세 따위는 없이 오직 ‘달아나는 것과의 놀이’,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사라져 가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행위, 가벼운 관계로서의 유쾌함을 반복하고 만다.

사람들은 도미니끄를 큰, 작은, 잠깐 들어온, 플로리다, 나쁜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마치 그들의 성은 기억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제인은 나쁜 도미니끄를 엄마, 누이, 연인, 때론 실패한 자선가의 모습으로 사랑하면서 비록 덧없는 일일 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한 애인의 품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애인의 품을 찾지만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그때마다 제인은 아주 오래전 자신을 품었을 엄마의 품을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날 제인은 클럽의 빨간 불빛 아래서 입양인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국 가족들의 식사 장면을 영화를 보듯 떠올리고 역시 영화를 보듯 한국 가족들이 웃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제인은 어디에도 온전히 스며들지 못하는 관찰자다. 때로 문턱은 넘기 어려운 장벽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꾸만 문턱을 넘어 누군가의 곁에서 살을 부딪고 싶다.


피아노 건반이 있는 풍경, 그 속에서 덧없는 환영들은 과거가 되었지만 현재의 삶에 투영된다. 실패와 성공, 잃음과 얻음 사이 제인의 대차대조표는 한국+미국은 = 0이다. 분명 여기와 저기, 그 어딘가에서 사랑받고 안전을 누리고 싶었으나 자꾸 바깥으로 내몰렸다. 그래도 피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찢겨가며 회귀한 한 마리의 연어다.

쁘로꼬피에프의 음악에는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알려주는 질서 정연한 시퀀스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퉁이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며 모퉁이를 향해 갈 때의 설렘은 두려움이 되고 절망이 된다. 돌아보면 삶은 덧없는 환영들이다. 지난날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현재의 모습이지만 그 최선에 대한 회의는 남게 마련이다. 어쩌면 제인이 쉼 없이 두드렸던 건반은 내 어릴 적 종이 건반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덧없는 작업, 소리조차 없는 종이 건반 위의 연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붙잡아 소리를 만들며 살아온 제인의 기록과 닮았다.


사랑과 안전을 찾아 헤매던 바람들이 수없이 뒤틀렸지만 제인은 최소한 천일은 더 한국에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그녀의 나날을 채워주기를 갈망하고 그녀의 밤들이 벽 저편에서 잠드는 낯 모르는 남자의 숨소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아직 오지 않은 언젠가는 공정하고 너그럽고 진실되고 풍요롭기를 바란다.

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박한 바람들은 등 돌린 괄호가 아닌 품는 괄호가 되어 그녀를 품어주었을까? 누구의 곁에서, 누구의 곁이 되어주었을까? 꼰스딴띤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의 시 ‘덧없는 환영마다 세상이 보이네, 다채로운 무지갯빛 가득한 세상들이’처럼 무지갯빛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 서 있을까? 보이지 않는 언어 창살을 걷어내고 입안 가득한 침묵을 회색 심장들의 따뜻한 웃음소리로 대체하고 있을까? / 려원


*2020년 한국번역문화원 주최 이산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쁘로꼬피에프의 '덧없는 환영' 음반을 사려고 했던 때가 벌써 3년 전이다. 아직 사지 못했다.

2020년 제인 정 트렌카의 『덧없는 환영들』이란 책을 읽었던 때도... 그녀의 글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파울 첼란의 시를 찾아보고 꼰스딴띤 드미뜨리예비치 발몬뜨의 시를 찾아보던 때가 벌써 3년 전이라니.. 그해 코로나로 시상식은 없었고 수상 소감을 동영상 파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문득 다시 읽어보는 글... 그땐 참 집요했구나. 이 짧은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쁘로코피에프의 음반 ...

'덧없는 환영들'을 사려고 ... 그 피아노 음악을 들어야만 제인 정 트랜카의 마음에 감정 이입이 될 것 같았던 그때...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색 '빨강'이 추방자들, 디아스포라들에겐 일종의 정지 신호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도... 그럼에도 빨간 것들 아래 몸을 부딪고 살고 싶다는 제인, 한국에서 천일을 더 살고 싶다던 그녀는 몸의 중심을 찾았을까. 연어의 회귀처럼 고통스러운 피의 언어를 찾는 여정이 행복하게 마무리되었을까.... 이미 천일이 지났으리라. 내가 이 글을 쓰던 날부터도 세어도 벌써 천일이 지났을지도 모르니.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산문집 /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쁘로꼬피에피의 음반을 사야겠다.

설령 '덧없는 환영'음반이 없더라도

그의 다른 피아노 협주곡이라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사람이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

순간 정신이 나태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

무언가를 쓰기로 작정한 사람은

무엇이든 끝없이 써야만 한다는 것을..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고

스스로에 대한 신의다.

결국 저마다의 삶이란 아직 오지 않은 '덧없는 환영'(미래)을 붙잡기 위한 여정이 아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6월이 벌써 종반을 향해간다. 무엇을 하였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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