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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

『채식주의자』한강


『채식주의자』/ 한강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탄탄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꿈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 평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는 ‘영혜’가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혜를 둘러싼 세 인물인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서술로

2부 몽고반점은 형부의 서술로

3부 나무불꽃은 언니 인혜의 서술이다     

영혜는 주도적인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3편에서 3명의 화자에 의해 진술되는 영혜의 모습에서 영혜의 목소리와 강렬한 몸짓을 독자는 읽는다.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이들로부터 자행되는 폭력, 가부장적 권위와 질서. 남편의 요구,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몸의 폭력, 영혜는 처음에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어떤 음식도 삼키려 하지 않고 스스로 나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혜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다른 생명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를 꿈꾼다.     


이 책의 개정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해 가을과 겨울밤들의 감각이었다. 몸이 회복된다면 쓰고 싶은 소설들의 목록을 (희망 없이) 마음속으로 굴리던 밤들. 그때 『채식주의자』는 이미 3부로 구성된 장편소설이었고, 지금과 같거나 거의 비슷한 제목들이 붙어 있었다. 그 후 삼 년이 흐른 뒤 첫머리를 쓰기 시작해 다시 이태 뒤에 완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나무 불꽃」을 쓰면서 ‘고통 3부작’이라는 파일명을 붙였던 기억이 난다.

출간 후 십오 년의 시간이 세찬 물살처럼 흐르는 동안,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세간의 관심도 오해도 뜨겁고 날카로워, 혼자서 이 소설을 써가던 순간들의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린 듯 느낀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귀밑머리가 희어지고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은 지금,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개정판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새롭게 만나게 될 독자들께 고맙고 반가운 인사를 드린다.     

                                                                                          2022년 이른 봄에 한강      

    

폭력과 아름다움의 처절한 공존     

『채식주의자』의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힌 영혜는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려 한다.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까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 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 할 필요도 패션 화보의 남자들과 비교할 필요도, 가느다란 팔뚝, 다리,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도 그녀 앞에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영혜의 남편은 아내의 조건으로 무리 속에 섞여있어도 튀지 않는 여자를 원했다. 결혼 5년 차가 되어도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권태로울 것도 없고 그때그때 성적 욕구만 해소하면 되는 용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벽지나 유행 지난 붙박이장 같은 아내 영혜가 이상한 꿈을 꾸면서 모든 상황이 돌변한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애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한 느낌을..”     


 P52 아버지는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지쳐가는,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다섯 바퀴를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여섯 바퀴 째 개는 검붉은 피를 토해... 일곱 바퀴...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덜렁거리는 네 다리, 핏물 고인 눈... 그날 저녁 우리 집애선 잔치가 벌어졌어...


사장 내외 상무, 전문 내외가 함께한 부부동반 모임.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그녀의 가슴에 쏠리는 묘한 시선, 호기심, 아연함, 약간의 주저가 어린 경멸 같은..     

언니 인혜의 집들이 겸 가족 모임에서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던 아버지에게 반발하며 자해소동을 벌이는 영혜, 엄마가 가져온 흑염소를 버려버리고 이미 목구멍을 넘어간 것은 다 토해버리고..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있는 거야....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아내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있었다.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왼쪽 손목의 붕대를 풀어버렸고. 피가 새어 나오기라도 하는 듯 봉합 부위를 천천히 핥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2부 「몽고반점」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나’는 결국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한 뒤 비디오작품을 촬영하고 다음 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스무 살 초입에 했다는 쌍꺼풀 수술이 자연스럽게 되어 아내의 눈매는 깊고 뚜렷했다. 갸름한 얼굴선, 목선. 서글서글한 인상... 사려 깊은 성격...

처제의 외까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곡식과 나물과 날 야채만 먹는다는 것마저 그 푸른 꽃잎 같은 반점의 이미지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어울리게 느껴졌다.

처제의 몸에 물감칠을 하기 위해 시트에 엎드리게 했을 때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힘이 있는 덧없음이 느껴졌다.


 p102먼저 목덜미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미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대신 그 푸르스름한 점 주변으로 그보다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지게 했다.


몽고반점 1-밤의 꽃과 낮의 꽃, 몽고반점 2는 진공공간과 같은 침묵 속에서 몸에 꽃을 그린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 몸의 몰입과 솔직한 몸짓.. 처제의 상대남으로 후배 J를 선택하지만 J는 결정적 장면에서 거부하고 작업실을 나가버린다.

“됐어요, 정말 추해지기 전에 그만해요. 정말 비참하군요.”     

오래전 연인이었던 p에게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영혜의 원룸으로 찾아간다.

J의 몸과 그녀의 몸이 그랬듯이 겹쳐진 꽃들... 꽃과 짐승과 인간을 뒤섞은 한 몸 같은.     

완벽했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렸다.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한다. 아내이자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갑작스러운 방문. 동생에 대한 보호의무에서 캠코더를 확인한 순간 모든 것이 드러난다.     


영혜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 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혜도 그도 열린 창문을 통해 꽃이 그려진 몸을 날렵하게 날리지 못한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와 계단을 올라오는 구급대원들에 붙잡혀...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 추문, 추악, 정신병자, 가정 파탄의 단어들로 오염된 채     


3부 「나무 불꽃」은 가족들 모두 등 돌린 영혜의 병시중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남편과의 결혼...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 생활을 헤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비춰보았던 것..

막을 수 없었을까. 그날 아버지의 손을, 영혜의 칼을,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을,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버린 것을,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 버린 것을..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 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려 하루로 나아가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 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 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면          


서쪽복도의 끝 기괴한 여환자. 어깨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선 영혜의 얼굴로 피가 몰려있었다.

“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서더라고.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P. 23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 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 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P. 220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만 소름 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어야 할 피일까

영혜는 피를 토하는 대신 눈을 뜬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본다. 저 눈 뒤에서 무엇이 술렁거리고 있을까. 어떤 공포, 어떤 분노, 어떤 고통이, 그녀가 모르는 어떤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까. -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불현듯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그녀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덜너덜 몸뚱이를 적시는, 바싹 마른 혈관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옷장문을 열고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라색 면티셔츠를 꺼냈다 젖내와 배냇내가 맡아지는 옷....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 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 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모빌을 매달았던 줄을 풀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오 층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뒤편 쪽문을 지나 뒷산으로, 어둡고 좁다란 길을 밟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묵묵히 문질렀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느꼈다,     


P 205

뒷산 나무들에게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의 그녀가 뒷걸음쳐 내려왔던 아침..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이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 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P. 221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 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갯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그녀의 목숨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어떤 나무도...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을 내뱉으며... 

 항상 성실하고 항상 최선을 다해왔던 삶. 인혜가 그 모든 행위가 덧없었다는 사실을, 결국은 비겁함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삶을 던져버리려 할 때 나무는 그녀의 목숨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영혜를 태운 구급차가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갈 때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온몸으로 폭력에 저항한 영혜.  영혜는 적극적으로 폭력에 대항한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해침으로써.. 식음을 전폐하고 나무가 되기로 작정하는 방식으로..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몽고반점에서 비디오 아트라는 영역, 온몸에 꽃, 식물 형상을 그린 형부와 영혜의 퍼포먼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싶었다. 가장 불편한 그러나 사실 이 부분 때문에 강렬한 소설로 각인되는 이중성을 지닌... 


영혜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 한마디에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원시림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다. 결코 아내에게선 찾을 수 없었던 것을 발견한 것처럼.  식물 페인팅이 되어있지 않은 몸으로 그가 그녀의 몸을 원할 때는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식물이 그려진 몸으로 돌아온 그를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푸른 물감이 짓물려 흘러내릴 때까지.

그러나 그의  행동 또한 예술을 빙자한 폭력이 아닐까. 고대 가면을 쓴 이들이 가면을 쓴 상태에서는 전혀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이 묵시적으로 용납되듯.  온몸에 식물을 그린 그들이 동물임을 은폐하고, 식물이 되어, 식물 가면을 둘러쓰고 오직 본능에 충실한 행위로... 예술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폭력의 희생자로 영혜만을 생각하지만  사실 또 다른 폭력의 희생자는 인혜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관성처럼 꾸역꾸역 생을 이어간 그녀는 자신의 욕구와 호소를 배설할 그 어떤 공간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좋은 인혜가 되기보다는  좋은 언니, 딸, 엄마, 아내가 되기 위해...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폭력에 내성이 생긴 채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잠재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짓누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비로소 그녀는 나무가 자신의 목숨을 거둬주기를 바랐지만 뒷산의 나무들은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일제히 거부한다. 


자학적 방식으로 폭력에 저항하는  영혜와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고 살아온 인혜

두 사람 모두 폭력의 희생자다.    

약하고 여린 것, 남과 다른 것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병원 분수대에서 동박새를 이빨로 물어뜯는 본능적, 태생적 폭력에서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일체의 진료와 식이요법을 거부하는 영혜의 모습과  모두들 포기한 영혜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지켜야 하는 인혜의 모습이 끝까지 안쓰럽게 각인된다.  우리는 대부분 인혜처럼 살아간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실함의 관성으로,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를 지키는 익숙함으로, 폭력을 알고 폭력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 폭력을 외면하는 방법으로 삶의 적절한 균형을 맞춘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일탈과 저항이란 단어를 머릿속 사전에서 일찌감치 지워버린 채로.... 잘 길들여진 사람으로....


인간이기에 인간다워야 하고

인간이기에 인간인 것을 부정한다.  선과 악, 미와 추, 수용과 거부 사이에서.


몇 년 전 부커상 수상후 처음 읽었을 때는 <몽고반점>이 거부감이 들었지만 다시 읽으니 다른 각도를 읽힌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 예술을 빙자한 또 다른 형태의 폭력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묘한 수용의 이중성. 그녀의 남편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원시적 욕망... 

그와 그녀 (영혜)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명쾌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나무불꽃.... 어둠 속의 나무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인혜)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짐승 같은 초록으로 일렁이며  우리를 쏘아보는 불꽃같은 책을.... 인혜처럼  어둡고 끈질기게 그러나 오래도록  밝게 바라보려 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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