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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Aug 23. 2021

너를 간직한다는 것

영화 <차일드 인 타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편의점에 가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던 때가 있었다. 나는 주로 민트맛 초코우유를 마셨다. 은은한 민트향이 나는 달콤한 초코우유였다. 해가 바뀌고,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는 나에게 편의점은 민트맛 초코우유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허용했다. 마침내 그 세상에 들어선 것에 우쭐하며 스무 살의 나는 달콤한 초코우유를 제쳐두고 쓰기만 한 것들을 곧잘 사 마셨다. 마치 달콤함을 놔두고 기꺼이 쓴 것을 고르는 그 행위가 나의 성숙함을 증명한다는 듯이. 그러면서 민트맛 초코우유는 서서히 잊혀 갔다.

 그러다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 편의점을 찾은 나는 한동안 눈길을 주지 않아 조금은 어색해진 그 우유를 집어들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초코우유를 사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몇 년 만에 마신 우유는 여전히 민트향이 옅게 감돌아 달콤했다.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금지당하는 ‘아이’.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아이’는 부정당한다. 부정당한 ‘아이’는 애써 꿈틀거리다가 시간이 흘러 아예 꿈틀거리는 방법조차 잊는다.


10년 후에도 스티븐에게 케이트가 여전히 사랑스러운 어린 딸인 것처럼 우리 안의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다. 물리적인 시간은 결코 어린 시절의 존재성을 앗아가지 못한다. 스스로 그 존재를 믿기만 한다면.




 때때로 나는 타인의 슬픔을 두고 조금만 슬퍼할 방법을 찾는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내가 조금 덜 슬플 수 있을지 궁리한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슬퍼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 여기면서.

 그 성숙함의 척도는 나의 아픔까지도 감춰버린다. 괜한 엄살을 부릴 만큼 자극에 민감했지만 언제부턴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다. 무심코 건드려지는 상처에 무심하려 애썼고, 그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누군가의 환부를 들여다볼 용기도, 여유도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라 믿었다. 슬픔을 통제하고 아파도 씩씩한지. 그 허술한 척도는 타인을 대하고 스스로를 살피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엔가 그 척도를 내려놓고 싶은 날이 있었다. 오롯이 슬퍼하고 아프면 엄살을 보태고 싶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자연스레 민트맛 초코우유를 사 마셨던 그날처럼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지금도 나는 종종 민트맛 초코우유를 집어든다. 달콤함을 고르는 그 행위는 나의 미숙함을 증명하지도, 성숙함을 반증하지도 않는다. 내가 민트와 초코와 우유를 좋아한다는 뜻 그뿐이다.

 

 우리가 슬픔에 무뎌지고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우린 모두 한없이 여린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유약함을 간직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력해지지 않을  있다.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유약함을 지나치지 않을  있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유약한 존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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