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생각하며
아쉬움은 남기려 한다. 애석함은 참기로 한다. 담담함을 더하려 한다. 그는 늘 스스로 작성한 보도자료의 끝에 '달빛요정이 달빛요정에 대해 말하다'라는 문구를 붙였다. 이제 주어가 바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요절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붙을 이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남겼다. 정규 앨범 석 장과 EP 석 장. 그는 인디 뮤지션으로 불렸지만, 정작 인디 음악계의 어떤 주류적인 흐름과는 상관없는 음악을 했다. 한국 음악계에서의 포지션은 인디로 통칭되는, 언더그라운 드였으되 음악적 경향의 측면에서 보자면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어떤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해야 한다. 팬들은 그를 '포스트 김광석'이라 불렀다. 삶의 단면을 절절히 드러내는 가사와 굵직한 창법 때문이었다. 신해철은 그를 '김창기의 역상(逆象)'이라 했다고 한다. 동물원의 일상성을 계승하되 밝음과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우울하고 처절한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두 개의 지칭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야기 구조가 명확한 가사다.
2003년 발매된 데뷔 앨범 <Infield Fly>에서 그에게 지명도를 안겨준 두 개의 노래가 있다. '절룩거리네'와 '스끼다시 내 인생'. '절룩거리네'는 MBC FM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 프로그램의 인디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 당시의 인디 신에서 뮤지션이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활발한 클럽 공연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통해 반응과 입소문이 생기고 레이블과 계약을 거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며, 그런 라이브 활동을 통해 생긴 반응을 기반으로 앨범을 내고, 그중 반응이 좋아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부르던 노래를 앨범 타이틀 곡으로 삼아 홍보하는 시스템이 당연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달빛요정은 앨범을 내기까지 이렇다 할 클럽 공연을 한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음악은 당시 인디 음악계의 어떤 경향과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즉, 마땅히 설 자리가 없었다는 얘기다.
'절룩거리네'는 펑크와 모던 록,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노래였다. 말하자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양분하고 있는 정치구도에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비주류 정치세력 같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세상에 등장하고 오랜 시간이 되지 않아 화제가 됐다. 신해철이 소개하는 인디 음악이 한두 곡도 아니었는데, ‘절룩거리네’는 <고스트네이션>이 발굴해낸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팔 할이 가사의 공이었다.
'지루한 옛 세상도/구역질 나는 세상도/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나의 모든 게 다 절룩거리네'라는 가사는 펑크에서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내용이다. '스끼다시 내 인생/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마을버스처럼 달려라/스끼다시 내 인생'으로 절정에 오르는 '스끼다시 내 인생'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명확한 1인칭 시점의 설정과 부르는 이의 빈 지갑과 통장 잔고가 눈에 그려질 정도의 상황 묘사는 달빛요정 음악을 규정하는 하나의 축이다.
물론, 인디 신에서 이런 자조적 가사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지만 달빛요정의 가사가 유독 주목받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확실한 가사 전달과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인디 신의 부정적, 공격적, 혹은 자조적 가사들을 담은 많은 노래들에는 메시지는 있으되 스토리는 없었다. 혹은 공격적이거나 우물거리는 창법에 의해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곤 했다.
반면 달빛요정의 가사는 그 누구보다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한 때의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낭만의 정조가 아닌 지금 당장 지금의 곤란하디 곤란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투영의 정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지독한 좌절감들은 대부분 힘찬 멜로디와 사운드를 통해 전달된다. 전개부와 절정부의 낙차는 크고, 조성은 대체로 장조를 사용한다. 희망 없는 세상, 절망스러운 처지를 노래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감격하듯 벅차오른다. 그것은 펑크, 혹은 서구의 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격성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즉, 특정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앞서 그가 인디 신의 주류적 흐름과 상관없는 음악을 했다고 말한 이유다.
이런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였을까. 달빛요정의 사운드는 여느 록 밴드들의 그것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밴드 음악, 혹은 밴드 사운드와 함께하는 싱어송라이터 음반의 사운드에서 중요한 건 밸런스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의 악기의 소리가 고루 잘 들리고, 적당한 위치에서 맺히는 사운드는 밴드 앨범 녹음의 기본이다.
그러나 달빛요정의 음반들에서 전면에 나서는 건 보컬이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비교적 또렷이 말하는 그의 발성법과 함께 도드라지게 들리는 보컬은 그의 가사에 힘을 더하고 방점을 찍는 요인이었다. 녹음에 대한 노하우가 없을 때 발표된 1집은 물론이고 노하우가 넉넉히 쌓이고, 밴드의 느낌을 강조했던 3집 <Goodbye Aluminum>까지 일관된 경향이었다.
이는 인디신의 방법론이라기보다는, 가수 중심의 문화가 정착되어있는 주류 대중음악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운드다. 밴드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보컬리스트들은 노래를 할 때 가사를 흘려보낸다. ‘이야기’보다는 ‘멜로디’ 전달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는 청소년기에 한국 음악보다는 서구의 음악을 들으며 뮤지션의 꿈을 키우는 한국 음악 소비문화에 원인이 있다.
그러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절룩거리네’부터 ‘나를 연애하게 하라’까지, 모든 노래를 또박 또박 끊어서 불렀다. 때로는 단어 단위로, 때로는 음절 단위로 한 음 한 음을 분명하게 발음했다. 단순히 가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에 더하여, 노래의 메인 테마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것 역시 달빛요정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절룩거리네’를 보자. 노래의 제목이 코러스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보컬은 더욱 격앙된다. 강세는 더해진다. ‘스끼다시 내 인생’이나 ‘행운아’역시 마찬가지다. 제목이 곧 주제이며, 코러스에서 반복되는 형식은 80년대까지의 록 음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던 패턴이다.
그가 초창기에 일반적인 인디 음악 애호가들보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각광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10대 20대의 음악 매니아층 보다 라디오를 통해 주로 음악을 접하게 되는 20-30대의 일반인의 촉수를 건드릴 수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유형화된 식습관이 있듯이 청습관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고, 달빛요정은 지난 시대의 정서와 가사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변주된 형태로 다가갔다.
그의 음악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은 사랑이었다. 사랑의 기쁨보다는 이별의 아픔이었다. 말없이 보내드리오리다, 도 아니고 복수할 테야, 도 아니고 그저 속절없이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노래들이었다. 사랑으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때는 고작해야 TV 속 미녀 아나운서를 보는 경우('내가 뉴스를 보는 이유')였고, 사랑에 대한 갈구가 가장 불타오른 건 외로워서 지쳤을 때('나를 연애하게 하라')였으며, 원망에 대한 노래로 얻고 싶은 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폐허의 콜렉션')이었다. 그도 분명히 연애를 해 봤을 텐데, 88만 원도 못 버는 신세에서 출발해 결국 월 100만 원을 버는 기쁨 비슷한 것을 누리는 처지가 됐는데, 결국 그런 낭만은 달빛요정의 음악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조연도 못 됐다. 아무리 삐딱하고 자조적인 사람이라도, 마음 어딘가에 갖고 있을 그런 사연과 생각들을 펼쳐보지도 않고 그는 떠났다. 통속성과 사회성이 결합된 이야기와, 80년대 가요와 90년대 록이 버무려진 음악을 남기고.
그가 남긴 이야기와 음악은, 오히려 그의 사후 재평가되고 있다.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리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퍼졌을 때 그 파장은 여느 연예인의 부고와는 달랐다. 알다시피, 그가 유명한 뮤지션이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한국 음악계에서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도 역시 아니다. 그의 노래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비보와 함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을 다시 이야기했고, 그 음악이 뒤늦게 이전에 그를 모르던 이들에게까지 공감의 파도를 일으켰기 때문이리라.
그가 데뷔했던 2003년, 그리고 2011년. 그 사이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가파른 속도로 진행됐다. 97년 국가부도사태 이후 구조조정의 프레임을 장악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평생고용의 신화는 단숨에 사라졌다. 중산층은 빠른 속도로 붕괴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을 때 들끓었던 벤처 거품은 꺼지고, 참여정부 탄생의 기반이었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그리고 달빛요정만루홈런이‘나는 개’에서 ‘왜 날 광장으로 내몰아/ 왜 널 상대하게 만들어’라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상이 찾아왔다. 88만 원 세대와 비정규직 문제가 그 어느 때 보다 격하게 달아오르는. 이런 상황에서 그가 데뷔했을 때와 그가 세상을 떴을 때, ‘스끼다시 내 인생’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가 더 많을까. 달빛요정이 드러낸 문제는, 그 7년 동안 대중음악이 그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했다는 거다.
주류 대중음악은 사랑타령, 이별타령을 넘어 아예 의미 없는 의성어로 도배되며 아예 가사의 개념을 변화시켜왔다. 사회는커녕, 개인의 투영마저 소멸시켜온 것이다. 창작자 위주의 시스템이 구축된 비주류 음악계에서도 ‘감성’과 ‘일상’이라는 개인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경향이 대세가 됐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한국의 대중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고작해야 영화에서나 우리의 현실을 읽어낼 수 있는 상황은 올바른가? 그렇지 않다. 멀리는 밥 딜런을 예찬하고 가까이 김광석을 사랑했던 계층은 늘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에게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이란 뒤늦게 발견한 일기장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직구와 같은 서사로 채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니었을까. 2000년대 후반 ‘루저 문화’를 대변한다며 이슈가 되었던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보다 더욱 짙은 농도의 이야기를 그의 사후에서야 만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한 가난한 뮤지션의 안타까운 죽음이 한 인간에 대한 애도를 넘어 음악에 대한 공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닐까. 가사가 음악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무시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음악의 요소임을 달빛요정만루홈런에 대한 추모 열기는 말해준 게 아닐까. 친분이 있었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생전 일면식도 없었던 동료 뮤지션들 100여 팀이 모여 추모공연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음악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곳의 거울임을 보여준다는 선언문 같은 게 아닐까. 예상외로 컸던, 달빛요정만루홈런 사후의 흐름을 보며 꼬리를 물었던 생각들이다. 아마, 틀리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의 첫 문장에서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그는 다음 앨범은 밝게 가겠다고 했다. 진짜 사랑 노래를 쓰겠다고 했다. 작사 작곡만 하고 노래는 다른 뮤지션들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래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활동하다가, 주변에 매니지먼트를 맡기기로 했다. 그의 하드디스크에는 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노래들이 잠들어 있다. 갑작스레 친구를 떠나 보낸 동료 뮤지션들이 그 노래들을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그가 보여주지 못했던, 달빛요정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법한 밝음이 그가 없는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있기를. 아쉬움은 그때 덜해질 것이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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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초 발간됐던, 이진원 유고집 <행운아>에 수록한 평문. 기일을 즈음하여 여기에 옮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