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에 가기 전부터 나는 잘란잘란, 이라는 말에 홀려 있었다.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잘란은 길이다. '잘란잘란'은 그냥 길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산책을 하고 있어요, 라는 뜻이라고 했다. 길에서 호객꾼들이 말을 걸어오면 잘란잘란이라고 하라고, 그러면 알아듣고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행책에 나와 있었다. 이게 참말일까?
첫날부터 시험해 보았다. 묵고 있던 숙소를 나서자 길 가에 서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굿모닝, 어디 가나요? 택시가 필요한가요? 하고 물었다. 헬로, 아임 잘란잘란, 이라고 했더니 그가 하하하 웃으며 오케이, 했다. 세상에, 이게 정말 먹히는구나! 그 후로도 트랜스뽀뜨? 택시? 에어포트?라고 호객하는 사람들에게 잘란잘란, 이라고 할 때마다 다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이건 마법의 단어였구나! 종일 잘란잘란을 입에 달고 다녔다.
우붓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다. 어찌 된 일인지 대부분의 관광객은 논에 미쳐 있다. 레스토랑과 호텔의 가장 좋은 전망은 논 뷰(view), 최고의 힐링은 논두렁 산책이다. 호남평야를 보유한 한국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서양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우붓의 투어는 쟁기질 체험이다. 숙소 입구에 꽂혀있던 투어 팸플릿에는 젊은 백인 친구가 푸른 논에서 황소를 몰면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루에 백번 씩 잘란잘란을 써먹고 있던 어느 날, 우붓의 논을 최대로 즐기기 위해 남의 논두렁을 산책하기로 했다. 왕궁을 지나 북쪽의 평야를 직선으로 걸어갔다가 한 바퀴 돌아오는, 지도에서 봤을 때는 참 쉬운 한 시간짜리 트래킹 코스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논두렁 잘란잘란'을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논에 접어드니 길은 여행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수많은 군락이 나타나고 그보다 더 많은 샛길들이 얽혀 있어,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점이라도 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벌써 등장했어야 할 반환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계속 걸었고, 더 깊은 논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는 잡초를 뽑으러 출근한 오리들만 있을 뿐, 집과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카페도 음식점도 없었다. 그렇게 끝도 없는 시간을 걸었다.
그늘도 없는 땡볕을 걷다 보니 챙겨 온 생수도 바닥이 났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단식 논 한가운데에 갇혀 있었다. 아니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싶었지만 논은 거미줄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논이 나타났고, 내려가면 똑같은 논이 또 나타났다. 뫼비우스의 띠가 이런 것일까. 이 방향이 북쪽인가 남쪽인가, 시내인가 시골인가.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푸르러서 이 논이 저 논 같고 이 벼가 저 벼 같았다. 묵직한 공포가 다가왔다. 열사병 초기 증상도 함께. 이건 더워서 나는 땀이 아니었다.
모내기를 방금 마친 벼에 코를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순간, 저 멀리서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농부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이다! 반경 이 킬로미터 내에 내가 아닌 인간이 또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조금 났다. 헬로! 여기요! 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윌슨은 없지만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된 기분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려던 아저씨는 내 목소리를 듣고 손날을 눈썹에 올려 해를 가렸다. 이 뜬금없는 장소에 외국인이 서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동작이었다. 서있는 저 여자애가 신기루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오토바이를 끌고 천천히 걸어왔다. 나도 다가가고 싶었지만 한 발짝이라도 더 디디면 쓰러질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아저씨가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몇 분이 몇 시간 같았다.
그렇게 아저씨가 반경 오십 미터까지 접근했다. 예의 순박한 얼굴을 가진 아저씨는 함박웃음을 띄며 나에게 외쳤다.
헬로, 아 유... 잘란잘란? ^^
노오오오! 노 잘란잘라안! 네버 잘란잘란! 아이 로스트! 우붓 시티!
참았던 서러움이 터졌다. 울면서 '노 잘란잘란'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저씨는 외국인의 갑작스러운 눈물 공격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내로 돌아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돈트 잘란잘란, 네버 잘란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