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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3. 2024

이게 아닌데

런던 8일 차 - 2024년 1월 15일

어제의 모든 폭풍을 겪고도 숙면을 했다. 나의 장점 중 하나는 어디서든 까다롭지 않게 잘 잔다는 것. 시와 때를 모르고 잠이 쏟아져 고생한 적은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애먹은 일은 생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만큼이다. 잘 자고 일어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새해의 시작인 1월에 휴가를 간다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연말정산도 있고, 작년 인사고과 발표도 있고, 회사의 새해 전략 수립과 방향을 위한 미팅과 면담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몸이 멀리 떨어져 있으려니 이래도 되나 싶더라. 내 나름대로는 최선의 시기를 고른 거였는데 꽤나 번잡하게 됐다. 혹여나 시차로, 다른 일정으로 기한을 놓칠까 봐 오전은 전부 연말정산에 할애했다. vpn이 쉽게 안 되어 한바탕 씨름하고 나니 벌써 체크아웃 시간이다. vpn 너어 쉽지 않네..


누가 영국 겨울 날씨 별로래! 날씨 요정은 햇님을 런던으로 데려왔지요. 공기가 차고 습도 높은 바람이 한기를 배가시킬지언정 날씨는 좋다. 아직 영국에 와서 제대로 된 비를 만난 적이 없다. 날씨 좋을 때 부지런히 다녀야지. 며칠 전부터 오른손 손목부터 전완근의 근육통이 있어 의아하던 참에, 오늘에서야 그 원인을 알아냈다. 한 손으로 캐리어 운전을 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 그래.. 짐을 자주 옮기긴 했지. 제발 오늘은 아무 일 없이 체크인할 수 있기를.


호스트가 안내한 위치대로라면, 지하철 한 라인의 거의 종점에 다다른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일산과 비슷한 동네일까 멋대로 넘겨짚으며 역에 내려 숙소까지 걸어간다. 어쩌면 진짜 일산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다. 복작거리던 런던 시내와 다르게 매우 조용한 주거 단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관광지에서 벗어나 현지인들이 정말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오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어젠 아파서 병원에 있었다는 호스트와 드디어 마주했다. 호스트는 집 안의 구석구석을 설명하고 떠났고 혼자 남아 다시금 둘러본다. 도착하면 빨래부터 해야지! 하는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한참을 서성였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정리를 하면 좀 나아진다. 빨래를 하려 하니 세제가 없구먼. 일단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마트에 다녀와야지.


숙소에는 nice river view라고 소개되어 있기에 그래도 기대를 했었나 보다. 다섯 걸음이면 횡단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강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마,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으면 최소한 템스강 정도는 되어야 할 것 아닌교!


영국의 대형 마트 체인 중 하나인 모리슨. 정말 오랜만이다. 모리슨은 엑시터에 살 때도 시내와 동떨어져 있어서 한 번 가려면 큰맘 먹고 가야 했었는데, 여기서 모리슨을 만나다니 나 정말 외곽으로 왔나 봐. 일단 당장 필요한 걸 전부 샀다. 세탁 세제, 샴푸, 린스, 소금, 후추, 심지어 설거지 수세미까지... 기묘한 기분을 씻어낼 요량으로 닥치는 대로 골라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도 서울에선 요리를 해 먹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터라 혼자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여간 당황한 게 아니다. 마트에서 우왕좌왕하다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샐러드 채소를 담았고, 어디선가 들었던, 질 좋은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만 있어도 충분히 맛있는 샐러드가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개중에 가장 비싸고 좋아 보이는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데려왔다. 예상했던 것의 두 배만큼 장을 봐서 돌아오는 길에, 이건 아니라는 한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일까? 일단 허기를 때우고자 준비한 레토르트 뵈프 부르기뇽과 샐러드는 정말이지 더럽게 맛이 없었다. 음식 맛을 까다롭게 가리는 편이 아닌 내가 한 입 먹자마자 맛이 없다는 평을 했다는 건 진짜로 별로인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계획하던 나의 휴가는 이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일상을 기대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호스트가 살던 흔적이 한껏 남아 있는 공간에서 찝찝한 기분을 마주할 거란 예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더구나 신장 1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흑인 남성 호스트에게 최적화된 싱크대, 선반, 전자레인지의 위치는 마음의 이질감을 더한다. 모든 게 묘하게 어긋나 있다. 꽤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자부했는데 서러움의 눈물이 났다. 그냥 다 취소하고 서울로, 내 침대가 있는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 상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노곤하게 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탁기는 두 시간째 속절없이 돌아가고 있다. 빨래가 완료될 때까지 이 불편한 기분을 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러워서 또 울었다. 위로도 통하지 않는, 깊고 좁은 마음의 지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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