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의자가 텅 비어 있는 이유
'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텅 비어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누군가 앉아 주길 기다리지만, 결국엔 아무도 앉아 주지 않는, 그런 텅 빈 의자 같은 풍경. 그래서일까? 고독은 결핍과 동의어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의 결핍, 사람의 결핍, 공감의 결핍, 교감의 결핍.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하염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핍은 그리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고독은 그렇게 계속 된다.
고독을 '무언가의 결핍'으로만 읽어내던 내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 강상중 교수의 책을 읽고 난 뒤의 일이다. 그 책에서 강상중 교수는 우리가 겪는 고독이 지나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한다. 고독을 텅 빈 의자라고 할 때, '결핍'에 대한 생각은 의자가 비어 있는 상태 그 자체에 주목한다. 반면에 '지나친 자의식'을 강조하는 강상중 교수의 설명은 의자가 비어 있는 상태 그 너머를 바라본다. 그것은 '어째서 이 의자가 비어 있는가?'에 대한 해설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순간에 행복함을 느끼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에 대한 이런 생각을 통틀어 자의식이라고 한다. 자의식은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많은 것들이 그렇듯, 자의식 역시 지나치면 독이 된다.
자의식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정신이다. 건강한 자의식은 삶을 보조하지만, 비대한 자의식은 삶을 컨트롤 하려 한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언제나 분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하기 어렵다. 또한 자신이 만들어 둔 틀을 벗어나는 경험과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쾌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큰 나머지 유쾌하지 않은 순간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큰 나머지 관계에서의 아주 작은 삐걱거림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지나친 자의식은 굉장히 깐깐한 채점관과 비슷하다. 채점관은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옆에 와서는 팔짱을 끼고 쳐다본다.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오답 판정을 내려 버린다. '너랑은 정말 말이 안 통해.', '앞으로 너랑은 절대로 얘기 안 할 거야.' 채점관은 다른 사람을 쉽게 내쫓아 버린다. 그렇게 의자를 비워둔 채 언젠가 찾아올 백 점짜리 상대방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아니었네. 하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야.'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고독은 지독해진다. 비어 있는 의자를 보며 채점관은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래서 혼자 다짐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채점 기준은 점점 더 높아져간다. 애석한 일이다.
지나친 자의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오답 판정을 내려버린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금방 오답 판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자의식은 내 마음의 문 앞에 버티고 선 채 자기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들은 그 어떤 것도 마음 속에 들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 이것이 마음 속 의자가 텅 비어 있는 이유.
고독하다, 외롭다, 하는 생각이 들면.. '왜 아무도 나를 발견해주지 못하는 거야?'라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의식이 너무 비대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너무 깐깐한 채점관이 내 마음의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아닌지. 그리고 주문을 외우듯 이런 상상을 한다.
자의식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내 마음의 문을 지키고 서 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의식의 손목을 잡아 끌어 푹신한 소파에 앉힌다. 그리고 큼직한 초코가 박혀 있는 쿠키와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대접한다. '안 되는데. 마음의 문을 지켜야 하는데..' 자의식은 혼자 웅얼대지만 나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의식의 혈관에는 이성과 단어가 흐른다. 그래서 말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다. 나는 자의식을 설득하는 대신, 들릴 듯 말 듯한 볼륨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틀어둔다. 천천히 움직이던 자의식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겨 버린다.
나는 녀석이 잠든 틈을 타서 마음의 빗장을 열어 젖힌다. 열쇠 모양과 꼭 맞지 않는다며 문전박대 당했던 동그라미와 세모와 네모가 내 마음에 놀러온다. 우리는 소근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잠들어 있는 자의식에게 선물할 롤링 페이퍼를 쓴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들이 쓰여 있다. '너 자는 모습 되게 귀엽다. 나 쫓아낼 땐 완전 장비처럼 무서웠는데!', '나는 요즘 느슨하게 사는 연습 중이야. 너는 느슨하게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오늘 잘 놀다 가! 다음엔 꼭 너도 같이 놀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자의식은 우리들의 체온으로 데워진 방 안에서 가만히 눈을 뜬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던 자의식이 조금은 작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