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
넷플릭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의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글(욕망을 삼키는 습관)에서는 항상 괜찮은 척 하던 키미가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상담사 안드레아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다뤄봤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습관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 수 있었죠. 오늘은 안드레아와 키미의 상담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키미는 안드레아의 진료실을 찾아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드레아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심지어는 키미를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안드레아 자신도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심한 알콜 의존증을 앓고 있었거든요. 낮의 안드레아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카운셀러지만, 밤의 안드레아는 충동적인 주정뱅이입니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낮과 밤을 분리해서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전혀 문제 없어요. 나는 전문가니까.
안드레아는 도와달라는 키미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감이 있어야 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거리감이 확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우버 기사로 일하는 키미는 안드레아가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 왔습니다.
밤의 안드레아는 낮의 안드레아가 억눌러 둔 본성입니다. 술에 취한 안드레아가 이성을 잃으면, 이성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성향, 즉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안드레아의 이성이 용납할 수 없었던 기질이 발현되는 거죠.
낮의 안드레아와 밤의 안드레아는 전혀 다른 두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인격에서 분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두뇌를 사용하죠. 그래서 밤의 안드레아는 낮의 안드레아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키미와 밤의 안드레아는 힘을 합쳐 낮의 안드레아를 협박합니다.
키미를 상담해 줘. 안 그러면 네가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다 소문 내버릴 거야.
그렇게 키미의 상담이 시작됩니다.
키미는 자기 문제의 근원은 벙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벙커로 납치되기 이전의 일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만 묻습니다. 의아해하는 키미에게 안드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키미를 만든 게 벙커뿐만은 아니니까요.
같은 비극을 겪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 비극에서 회복되는 속도와 양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안드레아가 키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캐묻는 것도 키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한 번의 상담으로 그걸 바로 알아낼 수는 없겠죠. 안드레아는 이 상담이 길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키미는 상담 중에 무척이나 화를 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순식간에 그 분노를 해결하죠. 내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그래서 분노는 곧 욕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키미에게 분노는 그저 나쁜 것에 불과합니다. 분노는 갈등의 불씨가 되고, 심한 경우에는 관계를 망가뜨리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키미는 분노를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대신에, 잠깐 현실을 도피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안드레아는 여기에서 힌트를 찾습니다. 그래서 숙제를 하나 내 주죠.
다음 상담에 오기 전까지는 꼭 한 번 화를 내보도록 해요.
머릿속 동화의 나라는 키미의 안전한 도피처입니다. 그 어떤 분노도, 갈등도, 싸움도 없는 안전한 곳입니다. 하지만 안드레아로부터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나자 키미의 동화 나라는 무척이나 잔혹하게 변해 버립니다.
키미가 숲 속에서 동물 친구들과 평화롭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교주가 들이 닥칩니다. 키미와 동물 친구들은 교주를 아주 끔찍한 형태로 살해한 뒤, 그것도 모자라 도망치는 요정까지 죽여버리죠. 행복한 동화나라는 비명과 핏자국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키미는 씩씩대며 안드레아를 찾아갑니다. 당신이 내 동화 나라를 망쳤다고 불평하는 키미에게 술에 취한 밤의 안드레아는 묻습니다.
그래서 뭘 알아냈니?
낮의 안드레아라면 천천히 시간을 줬겠지만 밤의 안드레아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힌트를 주며, 키미가 그 '깨달음'에 도착하도록 유도합니다.
그 날개 달린 요정! 널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아서 죽여버린 거잖아. 생각해봐. 네 인생에 그런 여자가 누군지. 너를 실망시킨 여자. 벙커 속에서 네가 원망한 여자.
키미는 이렇게 '엄마'라는 키워드에 도착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을 찾아낸 거죠. 키미의 엄마는 키미를 17살에 롤러코스터에서 출산했습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아이였다는 걸 알게 된 키미는 버림 받을 것이 두려워 내내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랐습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는 게 두려웠던 키미는 습관처럼 자기 욕망을 삼켜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답은 뻔해. 부모와의 관계가 문제야. 항상 그래.
그렇다면 안드레아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안드레아의 알콜 중독은 점점 심해져만 갑니다. 이제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죠. 자신의 상태에 심각함을 느낀 안드레아는 더 이상 키미의 상담을 못하겠다고 통보합니다.
하지만 키미는 어떻게든 안드레아를 도우려 하죠. 안드레아가 술을 못 마시도록 감시하기 위해 서로의 손목에 수갑까지 채웁니다. 그치만 안드레아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술을 마시며 키미를 실망시키죠.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안드레아의 질문에 키미는 말합니다.
난 다른 사람 돕는 걸 원래 좋아해요.
하지만 안드레아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키미의 진짜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내네요. 키미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실제 자기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그래요. 나 때문에 밤낮의 경계가 무너진 거잖아요.
내가 잘못해서 나를 떠나려는 거잖아요.
이번에도 역시 키미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던 건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항상 우선적으로 생각해 온 키미의 마음 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하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키미의 안쓰러운 마음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건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야.' 이 안쓰러운 마음을 안드레아는 가만히 만져줍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냐. 사람들이 떠나는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리고 키미가 집중해서 해결해야 할 부분을 알려주죠.
엄마랑 확실히 매듭 짓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될 거예요.
그걸 '패턴'이라고 해요.
키미는 안드레아가 준 숙제를 받아들고 떠나갑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래서 안드레아의 문제 역시 키미의 도움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드레아도 결국엔 상처가 있는 캐릭터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안드레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냥 남아 있는 게 좀 안타까웠습니다. 결국엔 술에 먹혀 버린 안드레아가 좀 가엾기도 했고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예전에 그랬듯 유능한 카운셀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키미가 다른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키미의 문제를 해결하는 포인트이기도 하죠.
드라마는 안드레아를 내버려 둔 채 그냥 달려갑니다. 이후에 안드레아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긴 한데요. 거기에서 안드레아는 결국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 주정뱅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안드레아는 그런 모습을 하고도 키미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 줍니다. 키미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안드레아를 꼭 끌어안죠. 안드레아는 이제 번듯한 진료실에 앉은 유능한 카운셀러가 아닙니다. 벌레가 잔뜩 빠져 있는 음료수 잔을 든 주정뱅이의 모습을 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미와 안드레아의 관계는 어떻게든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히 괜찮은 전개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키미는 안드레아와의 상담을 통해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인 "버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알아채는 장면을 살펴봤습니다. 키미는 그 오래된 문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자신의 엄마를 찾아 나섭니다.
키미는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오래된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