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장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글레 Jan 13. 2020

2020년에 보는
2002년의 사랑 이야기

커플 아바타 채팅 게임이 맺어준 인연, 영화 <후아유>


조승우, 이나영 주연의 2002년 영화, <후아유>를 오랜만에 꺼내봤습니다.


형태는 게임회사에서 일하며 후아유라는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후아유는 일종의 커플 아바타 채팅 게임인데요. 정식 오픈을 앞두고 베타 테스트가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이 게임에 모든 것을 건 형태는 숙식을 회사에서 해결하며 그야말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게임을 아주 혹평하는 유저 '별이'를 만나게 됩니다. 별이의 게임 파트너는 마침 형태의 회사 동료였는데요. 별이가 너무 괴팍해서 회사 동료가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별이가 63빌딩 수족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형태는 런칭 광고 인터뷰를 핑계 삼아 별이, 아니 인주를 찾아갑니다. 그러는 한편, 회사 동료의 게임 아이디를 넘겨 받아서 '멜로'라는 이름으로 '별이'와의 대화를 이어 갑니다. 


인주는 얼마 전 이별을 했습니다. 남자친구가 유학을 간다면서 떠나버렸거든요. 수족관에서 일하고 있는 인주는 어떻게든 인어쇼를 히트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주가 노력을 거듭할 수록 수족관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색해져만 가죠. 그런 인주에게 두 명의 사람이 다가옵니다. 한 명은 뺀질하게 생긴 게임 회사 직원 형태, 또 다른 한 명은 온라인에서 만난 게임 파트너 멜로. 


형태와 인주 둘 다 63빌딩에서 근무하다 보니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그 때마다 형태는 실실 웃으며 인사를 건네지만 인주는 그런 형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입니다. 


현실 속 인주-형태와 달리 게임 속 별이-멜로는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가짜 이름과 가짜 얼굴로 만난 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속 진짜 이야기를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네요. 별이는 멜로에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습니다. 청력을 잃은 이야기,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지난 3년의 이야기, ... 오랫동안 혼자 끌어안고 있던 이야기를 멜로에게 털어버린 뒤, 별이는 홀가분해집니다.


형태의 하루는 어느 새 인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낮에는 63빌딩에서 인주와 마주치고, 밤에는 게임 세계에서 별이와 이야기합니다. 형태는 인주가 곧 별이라는 걸 알고 있죠. 이렇게 인주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인주를 향한 형태의 마음도 조금씩 커져 갑니다. 하지만 형태는 인주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인주가 좋아하는 건 형태가 아니라 멜로라는 것.  그래서 괜히 인주 앞에서 멜로의 험담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인주는 그런 형태에게 화를 내죠. 그리고는 멜로에게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지만 형태는 이 상황이 답답할 뿐입니다. 그래서 형태는 인주에게,  아니 멜로는 별이에게, 묻습니다. 


너, 나에 대해 얼마나 아니 


별이는 잠깐 고민하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힘든 고백을 처음 들어 준 사람. 난 너를 이만큼만 알아도 충분해.


형태는 그 대답을 듣고 한숨을 쉽니다. 멜로라서 좋은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힘든 고백을 처음 들어준 사람이라서 좋다는 이야기로 들리니까요. 별이는 그런 형태의 마음도 모르고 노래를 신청합니다. 형태는 화를 꾹 참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멜로는 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고, 언제나 별이가 바라는 걸 해주는 사람이니까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별이는 재밌다는 듯 웃지만, 정작 그 노래를 부르는 멜로, 아니 형태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실컷 불러주고 난 뒤, 멜로는 별이에게 만나자고 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겠다고 결심한 거죠. 하지만 정작 인주가 카페에 들어서자 형태는 황급히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자신을 보고 실망할 인주를 보는 게 두려웠던 걸까요? 


그 날 이후로 형태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습니다. 인주는 일을 그만 두고, 형태네 게임회사도 이사를 가게 되죠. 어쩌면 이대로 멀어질 지 모르는 두 사람은 형태의 아지트인 63빌딩 옥상에서 간단한 송별회를 합니다. 


그 곳에서 형태는 인주에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인주는 형태의 마음을 굳이 거절하지 않습니다. 가상 세계보다 현실 세계가 더 낫자는 형태의 말에 설득된 걸까요? 그 날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진 멜로를 기다리며 가상 세계는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테스트가 종료되는 마지막 날, 별이는 멜로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전날 인주에게 고백하고 홀가분함을 느끼던 형태는 다시 착잡한 표정이 됩니다. 


멜로를 기다리는 인주 앞에 나타난 형태는 자신이 멜로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인주는 당황하며 자리를 떠나버리지만, 형태는 그런 인주를 계속 따라갑니다. 인주를 달래고, 설득하고, 분한 마음에 소리도 치고, 그러다 인주에게 맞기도 하면서 계속 따라갑니다. 


별이와 멜로가 만난 게임 세계에서는 접속하지 않은 상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이와 멜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돈된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인주와 형태가 서 있는 세계는 현실세계입니다. 너그럽지 않은 마음과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날이 선 채 부딪치는 곳이죠. 두 사람 역시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충돌합니다.


인주는 형태에게 가시를 세웁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척 하지마. 


하지만 형태는 그런 말을 듣고도 오히려 다가갑니다. 별이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해주는 멜로의 모습이 아니라, 형태의 모습으로 형태의 단어로 인주에게 이야기 합니다.

잘 안 들린다는 게 불행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거잖아, 너.
이건 아는 척이 아니야. 난 널 다 알아!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을 어떻게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인주가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형태가 헤드폰의 볼륨을 높이고 주변 사람들의 벙긋대는 입모양을 지켜봤던 것처럼요. 나는 널 다 알아, 라는 형태의 이야기에 인주는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감춰온 어두운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게 난감했겠죠.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홀가분했을 지도 모릅니다. 형태는 인주의 그런 어두운 구석을 알면서도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니까요. 인주의 마음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인주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계속 걷습니다. 훌쩍대며 걷는 인주 뒤를 형태가 조용히 따라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섭니다. 정말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형태의 옷깃을 인주가 조용히 잡아 끕니다. 형태가 준비한 전광판 광고를 함께 본 두 사람은 슬며시 웃습니다. 


어떤 충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어떤 충돌은 서로 다른 존재를 하나로 합치기도 합니다. 

인주는 형태에게 말합니다.

다음 파란 불에 건너자. 둘이 같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 갑니다. 


https://youtu.be/u9GybluyNjA


매거진의 이전글 <픽사 스토리>, 픽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