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의 오후는 대개 암기와의 전쟁이다. 특히 약리학 시간은 수많은 약물 이름과 그들이 몸속에서 벌이는 복잡한 외교전—수용체에 붙고, 분비를 억제하고, 유도를 촉진하는—의 기전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뇌가 팽팽하게 절여지곤 한다. 하지만 그 건조한 도식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그것이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를 그려놓은 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결국 거대한 '수용체(Receptor)'들의 집합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목표에 가닿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형상화한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분자라 할지라도 맞는 수용체를 찾지 못하면 그저 허공을 떠도는 유령일 뿐이다. 반대로 수용체 입장에선 아무리 매력적인 신호가 다가와도 자신의 구조와 맞지 않으면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기회조차도 결국은 '친화력(Affinity)'과 '효능(Efficacy)'의 문제인 셈이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억제의 기전'이다. 약리학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무언가를 쏟아부어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억제하는 놈을 다시 억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폭발적인 활성화를 유도한다. 우리 삶의 성취도 이와 닮았다. 성공은 무언가를 더하는 행위보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두려움이나 나태라는 '억제 인자'를 무력화시킬 때 비로소 터져 나온다. 부정의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되듯, 우리 몸과 삶은 이토록 정교한 이중 부정의 논리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약리학이 내게 준 가장 서늘한 교훈은 '용량'에 관한 것이다. 독성학의 아버지 파라셀수스는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용량이 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삶의 열정도, 타인을 향한 배려도 적절한 농도를 넘어서면 독이 된다. 수용체를 꽉 채우다 못해 감각을 마비시키는 '과잉'은 결국 내성을 부르고, 종국에는 반응 자체를 멈추게 한다.
나는 다시 강의자료로 눈을 돌린다. 수용체에 결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뒤트는 약물들의 분투를 읽으며 생각한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나는 적절한 용량의 작동제였을까, 아니면 불필요하게 통로를 막아선 길항제였을까.
강의실 밖, 오후의 햇살은 여전히 투명하게 쏟아진다. 태양으로부터 온 이 거대한 에너지가 지구라는 수용체에 부딪혀 생명이라는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이 거대한 임상시험의 한복판에서, 내게 주어진 오늘의 용량을 조심스럽게 가늠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