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지지 않기 위해, 구부러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룰루레몬은 시작부터 지금도, 7년간 겪었던 회사와 많은것이 다르다. 채용부터 회사생활 대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취업이 된 건가?’, ‘직장이 이렇기도 하구나‘ 생각한다. 여러 회사의 최종면접을 봤지만, 모든 회사는 지원부터 최종합격까지 적어도 한달 최대 세달까지 걸렸다. 대부분의 전형과정은 1200자가 넘는 논술문을 쓰고, 동료/ 상사 면접을 보고, 또 영어면접을 보고, 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함께 올라간 상대들 스펙이 반짝거려서 설레기도 하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면접과 동시에 레퍼런스 체크가 들어가서 마음 졸였다. 그래서 룰루레몬 면접은 참 가벼웠다. ‘이게 다인가요?’, ‘끝인가요?’라고 재차 물었다.
면접을 함께 보는 사람들도 그동안 내가 함께 일하거나 면접을 본 사람과 너무 달랐다. 누군 휴학을 하고 돈벌기 위해 왔고, 누군 호주에서 식당 서빙하다 왔고, 군입대를 앞둔 사람도 있었다. ‘살면서 힘든 게 뭐였나요’, ‘지원동기가 뭔가요?’ 등 간단한 질문이었고, 치밀한 논쟁이나 설득, 토론, 능력 증명 같은 건 없었다. 친구와 대화한 느낌이었다. 결과도 2주 만에 통보 받았다. 쉽게 취업이 되니 이상했다. 특히 연봉협상을 하고 화들짝 놀랐다. 정말 연봉이 산산조각 났다. 큰 고뇌에 빠졌다. 33살 경력 7년차, 연봉 점핑하기 가기 좋은 시기에 이 선택이 맞나 계속 되물었다. 근데 '너 지금 세일즈 하고 싶은 회사 골라갈 수 없으니, 주제 파악해'라고 첫 출근 전까지 죽비(竹篦)를 계속 쳤다.
근데 첫 출근 한날 또 너무 당황스러웠다. 세일즈를 하고 싶었지만, 상사가 매장 입구에 서서 '자 가서 손님에게 인사를 해보세요'라는 식의 지시를 했는데 '엥? 지금 당장? 제가요?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는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세일즈 하기 싫었다. 항상 대접받던 공간에서 갑자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해서 울고 싶었다. 마음 속에서 '야 배추, 지금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럼 뭐 네 인생 어쩌겠다는 거냐', '아 몰라, 나 집 갈래'라며 두명의 자아가 오락가락하여 번잡스러웠다. 다른 동료들은 옆에서 사근사근 잘도 하는데 난 머뭇거렸다. 나를 지켜보는 동료들의 눈빛이 느껴져 입장하는 손님에게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꿍얼꿍얼 매장을 안내했다. 그리고 멘토에게 조금 힘들고 어렵다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피팅룸에 가서 옷을 개는 일을 맡았다.
옷을 개면서 한숨이 났다. 내가 커리어를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지만, 너무 생각을 안 한 건가 싶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시장에서 야채장사할 땐 신명 나게 잘했는데, 매장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다가가서 인사하고 필요한 걸 찾아주는게 뭐 그리 어렵다고 못하겠다는 이유가 뭔지 알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고, 근데 돈은 벌어야 하고, 이대로 물러나긴 싫고 '아 어떻게 팔더라' 생각할 때 마르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귀한 농부'가 생각났다. 귀한 농부는 마르쉐에 장사를 하러 가면 가장 먼저 인사하러 들리는 농부다. 그분의 장사를 보면 기분이 좋다. 우선 패션이 상큼하다. 밤호박, 귤처럼 노란 것들을 팔아서 패션도 항상 상큼한 색깔을 포인트로 하고 가판 한가득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수북했다. 오는 손님은 물론, 지나가는 손님을 붙잡고 먼저 싱글벙글 웃음을 건넸다. 손수 귀하게 기른 밤호박, 귤, 레드키위 한 덩이를 내주면서 잡숴보라며 주신다. 땅과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어떻게 정직하게 농사를 했는지, 그래서 열매들이 얼마나 건강한지 유쾌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동시에 세일즈를 잘 못하는 농부님들도 생각났다. 마르쉐는 주기적으로 지방 여러 농부들을 서울로 초대해 소비자와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정직하게 농사를 지어 건강한 야채들을 가져오지만 그 야채들을 되가져 가는 일들도 잦다. 그걸 보면서 ‘튼튼하고 맛있는 야채를 왜 못 팔았지?’, ‘사람들이 왜 안샀지?’ 생각했다. 농부들이 서울에 와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해보고, 다른 농부들이 장사하는 걸 보면서 똑같이 하는 말이 있다. '우리도 장사를 배워야 해, 농사에만 갇혀있음 못써, 잘 파는 게 정말 중요해' 그 말들을 꺼내면서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연봉, 자존심 다 떠나서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란 걸 상기하려고 했다. 옷을 개키며 생각하니 맘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매장 문 앞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매장 방문하신 적 있나요? 필요한 것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마르쉐 시장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바로 판매로 연결되니 곧장 일이 재밌고 신났다.
어느 날, 옷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언니! 이 옷 사이즈 4로 좀 갖다 줘요'라고 말했다. 한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었는데 '설마 나한테 언니라고 부른 건가?'싶었다. 근데 그 공간에 직원은 나뿐이라 재빠르게 '네, 갖다 드릴게요'하고 창고에 가서 옷을 찾았다. 기분이 묘했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가볍게 부른 적이 있었나. 항상 기자님, 마케터님, 고객님라며 높힘을 받았는데 낯선 누군가가 가벼이 부르는 말에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창고를 오가며 옷을 가져다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해방감도 느꼈다. 나는 그동안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 생각을 한 오만한 사람이다. 그걸 모르고 살다가 이곳에서 일하고 나서야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이곳에서 더 일하면서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손님에게 옷을 건네고, 슬쩍 그와 어울리는 레깅스와 재킷을 추천해 팔았다. 평범한 손님이었는데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손님일 테다.
이전에 세일즈 팀에서 한 상사가 "너는 '자기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일을 잘하는데 한계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그땐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말을 한참 지나 그날에서야 이해됐다. 나는 고집과 자존심이 강해서 잘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일하면서도 주변의 대접받고 싶어 했고, 무시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그래서 연봉도, 직위도, 직무도 놓지 못했다. 올라갈 생각만 했고 양보엔 서툴렀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맴돌거나, 동료 마음에 상처를 줬다. 근데 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원하는 거 하나에 집중하니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물론 여전히 유연해지는 법을 터득하느라 고행(苦行)이다. 매일, 매분, 매초 이전에 중요하게 여긴 가치들을 내려놓지 못해 속 시끄럽다. 계속 서있는 직업이라 '아 무릎과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앉아서 일하는 책상물림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다'생각하기도 하고, SNS에 자주 뜨는 '30대 남자가 배우자에게 바라는 연봉 테이블‘ 포스팅을 보고 심난해져 리쿠르터들이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며 갈팡질팡한다. 밝게 인사해도 대답도 안하고 나를 귀찮아 하거나 피하는 손님을 마주해도 다시 다가가 말을 건다. 이 모든 과정이 내가 ‘구부러질 줄 아는 능력'을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추운 날씨에도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필요한게 있다면 말씀 해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배추도사의 생활 정보]
1. 귀한 농부 차차로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hacharo65/
- 차차로 농부님이 주말 마다 마르쉐에 나오는데요. 귤 철이 지나서 초겨울 보다 맛은 좀 떨어지더라도 건강하고 정직하게 기른 귤을 맛볼 수 있습니다. DM으로도 주문 할수 있어요. 농약과 왁스칠을 안해서 귤껍질도 와작와작 먹을 수 있는데 어찌나 상콤한지, 씹어먹어도 좋고 차로 내려마셔도 겨울 감기 물리칠 맛입니다!
- 차차로 농부님은 실제로 만나서 푸근한 인사를 나누며 대화도 하고 덤도 좀 달라고 애교도 부려서 받아내는 맛이 있어요.
2. 농부시장 마르쉐: https://www.instagram.com/marchefriends/
- 마르쉐가 겨울 방학을 마치고 올해 첫 시장을 열었답니다.
- 자세한 장터 일정은 인스타를 보고 알수 있습니다. 노지 농부님들이 많아서 채소와 과일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맛있는 요리사 분들이 나오고, 장볼 야채와 과일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