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아파트 광고에 흔히 나오지만 의아한 장면이 있다. 남자는 서재에서 사색을 하고, 여자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 남과 여를 떠나 인간이면 누구든 일하는 시대.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각자의 공간이 필수인 시대. 왜 여자가 서재에서 골똘히 사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 걸까. 게다가 서재는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부엌은 이제 가족 모두가 함께 해야 할 노동의 공간인데 말이다.
코로나로 하루 종일 집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엄마가 거실을 제방 마냥 어지른다는 걸 알았다. 인스타에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티와 케이크를 즐기며 재택 업무를 즐기는 모습을 올리려 했는데, 어떤 앵글로 해도 엄마의 자질구레한 물건들로 도무지 사진 각이 안 나왔다.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물건 한두 개를 앵글 밖으로 치운다고 될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각도를 바꿀 때마다 엄마의 옷, 가방, 화장품, 등산용품들이 성가셨다.
아침부터 엄마에게 핀잔을 줬다.
"엄마 왜 이렇게 거실을 더럽게 써, 가족 다 같이 쓰는 공간인데!"
엄마는 기죽지 않고 응수했다.
"여기 내 집이고, 거실도 내 거야, 넌 네 방 있으니깐 네 방에서만 마음대로 해!"
엄마의 말은 항상 맞지만, 딸은 이해할 수 없다. 엄마가 외출한 사이 거실 청소를 했다. 청소의 대부분은 엄마의 물건들을 치우는 일. 그때 깨달았다. 엄마 물건을 둘 공간이 없다는 걸. 바리스타 시험을 위해 산 노트와 필통, 그림을 그리기 취미를 위한 붓, 그리고 산책을 갈 때마다 쓰는 배낭이나 산행 도구들을 둘 마땅한 방이 없었다. 엄마는 커피부터, 그림, 플루트 등 다양한 취미를 발만 담그다 그만뒀다. 단순히 엄마가 싫증을 쉽게 느끼는 성격이라 생각했다. 이날, 엄마는 취미를 즐기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취미를 즐기기 위해선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취미 도구들을 다듬으면서 내 물건과 교류하고, 밖에서 배운 지식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소화해내는 사색과 몰두의 시간이 필수다. 하지만 엄마에겐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정리한 거실을 둘러보니 거실 곳곳 엄마의 취미나, 수집도구들이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들과 바다에 놀러 가서 주워온 조개껍질들이 창가에 있었다. 반대쪽 창가에는 개울가에서 주어온 조약돌이. 그리고 공책에는 단풍잎들이 꽂혀 있었다. 예전에도 이 수집품들을 언뜻 봤었다. 근데 거실을 오고 가며 별생각 없이 스치고, 떨어뜨리거나, 버릴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것들이 하나하나 다 엄마의 추억이고 취향이구나 싶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게 요지)'이라는 책은 언 100년 전에 쓰였는데,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네 살부터 내 방이 있었기에 책 제목을 듣고 '요즘은 시대가 변했지'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여전히 버지니아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가족들이 방에 들어가 각자의 취미를 즐길 때. 엄마는 혼자 거실에 남겨졌다. 이 날 이후 내방 문 넘어 거실의 티브이 소리가 정말 외롭게 느껴졌다.
구시대적인 아파트의 광고와 달리 결혼하면 남편에게 꼭 각자의 방을 갖자고, 나도 서재가 필요한 여자라고 말할 예정이다. 그리고 꼭 시집가기 전 내 돈을 들여 핑크 핑크 한 내방을 우리 엄마방으로 꾸며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엄마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선, 창가에 먼지 쌓인 조개껍질과 조약돌을 반질반질 매주 닦아주고, 주말마다 거실을 깨끗이 청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