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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Apr 01. 2021

싱글여성이 700만 원짜리 시계를 사고 깨달은 것

소비의 제맛은 내가 원하는 걸, 내 돈으로 살 때

@feelgraphy

누구든 갖고 싶은 비싼 물건이 하나쯤은 있다. 그 물건을 사는 방법은 돈을 벌어서 직접 사면 된다. 이 당연한 명제가 나에겐 참으로 어려웠다. 갖고 싶은 물건은 까르띠에 시계였다. 좋아하는 영화 인턴의 주인공 앤 해서웨이가 차고 있던 시계. 사업가인 그녀 손목에 까르띠에 시계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2년 적금을 들었다. 그리고 만기가 되는 날 백화점에 가서 샀다. 영화 속 재벌집 딸처럼 한번 차보고 '이걸로 주세요'라고 말하고 일시불로 700만 원을 긁었다. 통쾌했다.


속전속결의 결재 과정과 달리 사기까진 우여곡절이 많았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쓸 물건을 사겠다는데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 말 중에서도 부모의 말은 비수를 꽂았다. 처음엔 지금은 집을 사기 위해서 돈을 모아야 할 때라고 했다. 정말 돈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에 반박하니 구체적으론 네가 결혼을 하면 더 좋은 시계를 가질 수 있으니 결혼하라고 했다. 당시 남자 친구 없는 29살이었다. 아직 결혼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내게, 결혼을 하면 예물시계가 절로 생긴다는 발상이 기발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까르띠에 시계 구매를 만류하기 위한 그 근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까르띠에 시계를 사고서야 내 안에 벽을 하나 무너 뜨렸다. 나이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비싼 물건을 살 때는 부모에게 허락받거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기를 바라왔던 나를 마주해야 했다. 아빠의 논리에 '까르띠에 사줄 남편감은 절로 생기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사실 아빠의 사고방식과 일상생활 속 나의 무의식은 똑같았다. 습관적으로 부모나 미래의 남자 친구, 남편 될 사람에게 기대를 하면서 살았다. 당장 남자 친구는 없으면서 크리스마스에 남자 친구가 사줬으면 싶은 위시리스트를 적었고, 인스타그램에 누군가가 남자 친구나 예비신랑에게서 받는 선물을 보고 부러워하고 나도 똑같이 대접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에 남자친구가 생겼다면 은연중에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못 받았다면 속상해했을 거 같다.


까르띠에 시계를 사기 위해서 줄 섰던 날. 들떠 있는 커플들 속, 홀로 체크카드를 들고 기다렸다. 각자가 원하는 걸 얻는 방법이 있고 난 내 돈으로 사는 게 편하고 행복하구나라는 걸 느꼈다. 오롯이 나의 노동의 대가인 까르띠에 시계를 샀을 때 처음으로 진정한 소비의 행복을 체험했다. 그동안은 부모든, 친구든, 누구에게든 비싼 걸 받으면 그 대가로 괜히 한동안 착하게 굴거나 애교를 부리며 노력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어색한 아부와 헛된 기대의 날들은 그날부로 이별했다.


까르띠에 시계를 내 돈 주고 산 이후로 누군가에게 선물 받기를 기대하는 날이 없다. 꼭 필요한데 사고 싶은 물건을 남이 사주리라는 기대를 안으며 생일, 기념일 때 즈음 힌트를 흘리는 힘겨운 눈치 싸움은 하지 않는다. 비싸더라도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내가 산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 하고 연봉협상을 잘하려고 한다. 대신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상대가 돈으로 사줄 수 없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잘 듣는 태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 돈을 쓰지 않고도 감동시키는 행동들 말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더 나은 소비, 상대에게 나만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고민한다. 내가 살 수 있는걸 내 돈으로 사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진정한 가치들을 키우고 찾으려고 한다.


매일 아침마다 까르띠에 시계를 찬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는데 그 말들이 마음에 든다. 내가 사고 싶은 건 내 돈으로 내가 벌어서 산다. 난 누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는 건 내가 노력해서 얻는 여자가 되자.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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