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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바람을 맞는 나무의 마음

25. 10. 13. (월)

by 영글생

이번 추석 연휴는 길면서 바빴다. 올해는 처가에 먼저 들렀다. 전날 저녁에 제주 사는 처형네가 왔는데 우리 가족을 기다리느라고 점심까지 쫄쫄 굶고 있었단다. 긴 일정에 우리도 챙길 짐이 많기야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난다. 식사를 한 뒤 여자들은 장을 보러 갔다. 장인어른은 얼마 전부터 음대 교수로 퇴직하신, 아내의 당고모부와 작곡에 재미를 붙이셨다. 운을 띄우니 본격적으로 작곡 프로그램을 열어 놓고 강의를 하신다. AI 보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밤이 깊었다. 아내는 장모님과 LA갈비를 재우고 올라와서 손이 아프단다. 모아 둔 온누리 상품권으로 양가에 갈비를 샀는데 양념 마련에 장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명절에 예배를 드리는 처가와 달리, 본가에서는 차례를 지낸다. 추석 당일은 일찍 시작된다. 마련한 음식을 올리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재롱을 한껏 부렸다. 한복을 입은 손녀들에게 정신이 팔린 부모님은 상을 물릴 때가 지난 줄도 모르신다. 일찍 차례를 마치고 성묘를 가려했는데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져서 하루 미뤘다. 피곤했는지 식구들이 돌아가며 낮잠을 잤다.


다음 날은 이천으로 성묘를 다녀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화순에서 성묘는 의례적인 행사였다. 정해진 코스에 들러 절을 하는데 할아버지를 모신 이천까지는 이따금 귀경길에 들리는 정도였다. 재작년에 이르러서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성묘를 생략하자고 말씀하시기에 이르렀다. "내가 60년 넘게 다녔으니 이제 좀 빠진다고 뭐라 하시겠냐." 우리는 희희낙락하며 작은 아버지네와 함께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조상님도 좋아하시겠지. 이제 우리 집도 성묘 대신 좀 놀러 다니나 싶었는데, 작년에 부모님 댁에서 명절을 쇠면서부터 조부모님을 모신 이천의 호국원을 찾는다.


호국원은 국가 유공자들을 모신 국립묘지이다. 노성산 자락에 조성된 봉안담에는 유골이 모셔져 있는데 신상이 적힌 명패에서 생몰일자나 공훈 내역들을 보면 갖은 이야기들이 느껴진다. 고인을 기리는 참배객들의 모습도 다양하다. 봉안담 앞에 걸게 한 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가족들, 백발이 내린 노구를 이끌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해맑게 웃고 떠드는 어린아이들. 특히 눈길을 잡아 끈 사람은 봉암담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노파와 여인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바닥에 간단한 것을 깔고 앉아서 우산을 쓰고 그저 봉안함을 바라만 보고들 있었다. 노파의 사위와 손주로 추정되는 이들이 오고도 그들은 한참 더 그렇게 있었다. 산 자와 망자의 거리가 새삼 아득하다.


부모가 되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 더 더듬게 된다. 그리고 자식의 효孝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하게 된다. 차안此岸의 자식이 피안彼岸에 있는 부모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앙이 있으면 좋다. 체계적이고 분명한 방법과 체제를 알려주니까. 이에 반해 종교 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전통 방식을 따르기도 한다. 그래서 명절이면 차례와 성묘에 마음을 쓴다. 이는 남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는 위로이자, 돌아가신 이를 향한 마음을 표현할 창구이고 저 세상의 고인과 이어진 끈이다. 시간이 흘러서 그 자식도 자식을 낳고 손주를 보고 이렇게 세대가 이어지면 다시 선대가 아니라 후대로 초점이 모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부모를 추억하는 자식의 마음이 달래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연휴 기간 중에 아버지와 첫째 유나의 생일 파티를 했다. 케이크를 준비하다 보니 아버지의 연세가 새삼스럽다. 세는 나이로 69. 인터넷을 찾아보니 칠순 잔치는 만 나이로도 하고 세는 나이로도 한단다. 내가 나이 들고 아이들이 커가는 것만 눈에 보였는데, 부모님도 함께 늙고 계셨다. 시경詩經의 해설서인 한시외전의 9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멈춰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네" 풍수지탄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구절이 특히 이번 명절에 맴돈다. 본가와 처가 부모님들이 하루라도 더 젊으실 때 자주 찾아뵙고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겠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더 늘려가야지. 바람은 그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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