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까요?

by 테라

매주 일요일 10시,

상담심리사 플레이리스트는 오늘을 마지막 회로 인사를 드립니다.


본디 서른 개의 따뜻한 위로와 음악을 들려드리고자 리스트를 준비해 두었지만,

제게 무척 기쁘고 감사한 일이 생겨 조금 일찍 연재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최근 아주 좋은 인연을 만나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부족한 글과 기획의 방향을 어여쁘게 보듬어주신 출판사와 함께,

이제는 화면을 넘어 온기가 담긴 종이책으로

예비 독자님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에는 깊고 치열한 퇴고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저의 여러 캐릭터 중, 교육에 관련된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문해력)


매주 일요일 밤마다 제 글과 음악에 기꺼이 마음을 기대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연재는 여기서 잠시 멈추지만,

다시 또 다른 색의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모두, 스스로에게 다정한 밤이 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밤 10시입니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보다,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때 우리는 훨씬 더 무거운 호흡을 내쉬게 됩니다.

처음의 시작이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실패해 본 기억, 상처받았던 경험, 그리고 또다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그 지독한 두려움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걸음을 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많은 분들이 이 두려움 앞에서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서성입니다.



저도 다시 잘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열정이 생기지 않아요.
제가 또 실패하면 어쩌죠?
그때는 정말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것 같아요.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흔히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에너지가 가득 채워진 상태나,

과거의 실패를 말끔히 잊어버린 강인한 정신력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툭툭 털고 일어나라는 주변의 응원이 때로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고, 여전히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고 게으르게만 느껴지곤 하죠.


우리가 다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세상의 흔한 위로나 조언들은 아주 명쾌하고 씩씩한 정답을 건네며 우리의 등을 떠밀곤 합니다.


과거는 잊고 툭툭 털고 일어나세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다시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한 걸음만 떼어보세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실패의 상처로 온몸이 방전된 사람에게,

무작정 의지를 내어 다시 부딪혀보라는 말은 때론 너무 차갑고 가혹하게 들립니다.

과거를 잊고 일어나라는 그 씩씩한 조언은,

상처받을까 봐 웅크린 우리의 여린 마음을 의지 부족이나 게으름으로 깎아내리며

우리를 더 깊은 자기혐오의 늪으로 빠뜨릴 뿐입니다.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를 이토록 두려워하는 애틋한 심리적 기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하거나 나약해서 발을 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마음은 학습된 무기력과 상처받은 자아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아주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틴 셀리그만은
반복적인 실패나 통제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은 존재가, 결국 스스로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게 되는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과거의 뼈아픈 실패 경험이 나의 뇌에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을 깊게 각인시켜 버린 것입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이 도전을 회피하는 이유를 상처받지 않기 위한 목적에서 찾았습니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어라는 환상 속에 내 자존감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다시 시작하는 것을 미루고 웅크리고 있는 걸까요.


당신의 무의식이, 또다시 실패하여 내 존재 가치가 산산조각 나는 그 끔찍한 고통을 막아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라는 아주 값비싼 희생을 치르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게으르거나 못나서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내 자존감을 지켜내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당신 내면아이의 가장 간절하고 눈물겨운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가 강조한 자기 자비에서 피어납니다.

피가 나는 내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또다시 실패하고 넘어진다 해도

나만은 나를 끝까지 비난하지 않고 다정하게 지켜주겠다는 단단한 애착과 허락입니다.





오늘 밤, 두려움 앞에서도 기어이 다시 시작하려는 당신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는

정인의 <오르막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A06nvaT72Q&list=RDTA06nvaT72Q&start_radio=1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 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 줘

그러면 견디겠어



이제부터 웃음기가 사라질 거라며 가파른 길을 똑바로 보여주는 이 가사는,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하고 헛된 희망보다 훨씬 더 깊고 묵직한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는,

또다시 마주하게 될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숨죽여 울던 당신 안의 아이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노래는 아득한 저 끝의 결과표를 보지 말고 그저 지금 내딛는 한 걸음에만 집중하라고 말해줍니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거나 꽃길만 펼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넘어지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날들이 반드시 찾아오겠지요.


하지만 그 오르막길을 걷는 동안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실패하고 넘어진다 해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줄,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당신 자신이 평온한 눈빛으로 곁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밤은 완벽한 타이밍이나 거창한 에너지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대신,

조용히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스스로에게 말해주세요.


아, 내가 또 상처받고 실패할까 봐 너무 두려웠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어떻든, 숨이 차고 땀이 흐르는 이 가파른 길 위에서

내가 나를 끝까지 다정하게 지켜줄게.


그 애틋하고 단단한 약속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두려움의 껍질을 깨고 다시 시작하는 그 눈부신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오늘의 마음 문장


다시 시작할 용기는
상처가 모두 아물었거나
당신이 완벽하게
강해져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다시 넘어지고 상처받는다 해도
기어이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내겠다는
그 다정하고도 치열한 결심에서 피어납니다.
이제는 아득한 끝을 걱정하는 대신,
나를 믿고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디뎌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