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by 테라

밤 10시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고요한 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인기척을 살피며 혼자 서운함을 삼키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무슨 일 있어? 안 좋은 일 있어? 하고 묻는 다정한 사람에게

아니, 아무 일 없어, 피곤해서 그래 하고 툭 내뱉어 놓고는,

그 사람이 정말 아무 일 없는 줄 알고 돌아서면 가슴이 쿵 하고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습니다.


내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해놓고,

속으로는 제발 내 표정을 보고 한 번만 더 물어봐 주기를,

말하지 않아도 내 지치고 서운한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채 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 답답하고도 슬픈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은 이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아주 유치하고 피곤한 사람처럼 느끼며 부끄러워합니다.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아냐는 상대방의 항변 앞에서 결국 할 말이 없어지고, 혼자서만 억지를 부린 것 같아 깊은 자책에 빠지기 때문이죠.


오늘도 S님은 붉어진 눈시울로 소파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사람을 시험하고
피곤하게 만들까요.
남편이 제 기분을 알아채지 못하면
너무 서운해서 입을 꾹 닫아버려요.
뭐가 불만인지 말해달라고 하는데,
그걸 꼭 내 입으로 다 설명해야
아나 싶어서 더 화가 나요.
말하지 않아도 내 힘든 걸 좀 알아주고
먼저 안아주면 좋을 텐데,
눈치 없이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면
제가 너무 초라하고 외로워집니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을
꽁하게 담아두는 제가
너무 꼬이고 덜 자란 어른 같아요.

우리가 굳게 입을 다물고 상대의 눈치를 살필 때,

세상의 흔한 위로나 이성적인 심리학 글들은 아주 바르고 명쾌한 정답을 건네며 우리의 등을 떠밀곤 합니다.


"독심술을 바라지 마세요.

사람의 마음은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나-전달법(I-message)을 사용해서 당신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하세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닫혀버려 온몸이 방전된 사람에게,

당장 감정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라는 말은 때론 너무 차갑고 가혹하게 들립니다.

말해야 안다는 그 지당한 조언은, 알아서 내 마음을 보듬어주기를 바랐던 우리의 여린 기대를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 하는 미성숙한 투정으로 깎아내리며 우리를 더 외로운 구석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심리치료의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이토록 억지를 부리며 말 없는 이해를 갈구하는 충격적이고도 애틋한 이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하거나 성격이 꼬여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언어를 넘어서서 내 마음을 완벽하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유아기의 모성적 공생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인 퇴행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 가장 처음 경험하는 완벽한 사랑은 말이 필요 없는 사랑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시절, 양육자는 아이의 미세한 표정이나 작은 숨소리, 울음의 높낮이만 듣고도 배가 고픈지, 졸린지, 어디가 아픈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품을 내어줍니다.
나의 결핍을 말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채워주는 이 마법 같은 경험은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가장 궁극적이고 안전한 사랑의 원형으로 각인됩니다.


우리는 왜 기어이 입을 닫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맞히기를 기다리는 걸까요?


당신의 무의식이, 팍팍한 현실과 상처받는 관계들 속에서 너무나 지친 나머지

나를 가장 안전하게 품어주었던 그 완벽한 엄마의 품을 간절히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내 논리와 이유를 다 설명해야만 겨우 이해받는 얄팍한 어른의 관계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온전히 수용받았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에게서 확인받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처절한 몸부림인 셈입니다.


우리는 나를 지치게 하는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말하지 않아도 내 아픔을 찰떡같이 알아주던 그 완벽한 사랑의 구원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밤, 굳게 닫힌 입술 너머로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다리는 당신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는

제이레빗의 <요즘 너 말야>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L75qyvHXAs&list=RDtL75qyvHXAs&start_radio=1


요즘 너 말야, 참 고민이 많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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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들고 주저앉고 싶을 땐 이렇게

기쁨의 노랠 불러 씩씩하게

언젠가 모두 추억이 될 오늘을

감사해 기억해 힘을 내, MY FRIEND.




너 고민이 많아 보인다고, 꼬여버린 하루 속에서도

넌 혼자가 아니라고 밝게 말을 건네는 이 다정한 가사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가 먼저 내 무거운 마음을 알아채고 환하게 웃어주길 바라는 우리의 여린 마음을 가장 기분 좋게 안아줍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입을 다문 채 알아맞혀 주기를 바랐던 이유는,

내 감정과 상처를 꺼내어 증명하느라 진을 빼지 않아도

그저 내 표정 하나만 보고 무슨 일 있냐며 다가와 주던

그 완벽하고 무조건적인 품이

오늘따라 너무도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팍팍한 현실에 지쳐버린 당신 안의 아이가,

세상의 피곤한 대화는 다 내려놓고 제발 누가 먼저 내 마음을 알아채고 넌 혼자가 아니라고 경쾌하게 말해달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다정한 사람도, 심지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내 마음을 말하지 않고는 온전히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각자의 꼬여버린 하루를 풀어내느라

애쓰는 불완전한 타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상대를 원망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자책을 멈출 수 있습니다.


오늘 밤은 아무도 몰라주는 서운함에 웅크리고 있는 대신,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꾹 다문 입술 너머의 마음을 다 아는 사람, 바로 당신 스스로가 그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주세요.


그리고 노랫말처럼 당신 스스로에게 가장 다정하고 밝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네주세요.


아, 요즘 내가 참 고민이 많고 지쳤구나.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줄,

어릴 적 그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을 너무 간절히 바랐구나.


그 애틋하고 여린 마음을 당신이 먼저 알아차려 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굳게 닫힌 서운함의 감옥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진정으로 안아주는 눈부신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오늘의 마음 문장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당신이 유치하거나 미성숙해서가 아닙니다.
내 존재 자체를 온전히 수용해 주던
그 완벽하고 따뜻한 사랑의 품이
오늘 하루,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직접,
그 여린 마음을 알아주고
안아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