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속에 사는 오늘

by 테라

밤 10시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고요한 밤, 서랍장 깊은 곳에 넣어둔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보거나,

스마트폰 사진첩을 한참이나 위로 쓸어 올리며 멈춰있는 날이 있습니다.


가장 빛났던 이십 대의 어느 날, 혹은 모든 것이 단순하고 따뜻했던 지난 시간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아, 그때가 진짜 좋았지. 그땐 이렇게 매일이 숨 막히고 버겁지 않았는데.


머리로는 지나간 시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현실의 무거움에 치일 때면 자꾸만 아름다웠던 과거로 도망치듯 숨어버립니다. 상담실에는 이처럼 찬란했던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며 빛바랜 현재를 견뎌내는 분들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은 무기력감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만 묶여 있는 자신이 어딘가 나약한 현실 도피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오늘도 U님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돼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숙제처럼
무겁고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자꾸 예전 생각만 나요.
친구들과 밤새 웃고 떠들던 학창 시절이나,
아무것도 몰랐지만 열정 넘치던
신입사원 때의 사진을 보면서
그때가 참 좋았는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해요.
과거에 묶여서
오늘을 살지 못하는 제가
참 한심하고 바보 같아요.
이러다 영원히 제자리걸음만 할 것 같아
두려워요.



우리가 뒤를 돌아보며 주춤거릴 때,

세상의 흔한 위로나 많은 조언들은 아주 바르고 이성적인 정답을 건네며 우리의 등을 앞을 향해 떠밀곤 합니다.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세요.

추억은 힘이 없습니다.

과거를 미화하는 습관을 버리고, 당신이 발 딛고 있는 오늘에 집중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라는 그 강박이, 추억에서라도 온기를 찾으려는 나 자신을 현실 도피자로 깎아내리며 우리를 더 춥고 외롭게 만들 뿐입니다.


심리치료의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이토록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그리워하는 충격적이고도 애틋한 이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라서 과거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지나간 과거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회상하며 위안을 얻으려는 현상은
무드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가장 뼈아프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거의 나쁜 기억은 흐릿하게 지워버리고,
좋았던 기억은 더욱 아름답게 윤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기어이 닿을 수도 없는 과거의 사진첩을 뒤적이는 걸까요?


우리가 현실 도피자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는 서늘하고 팍팍한 오늘을 견뎌내기 위해

나를 가장 안전하게 품어주었던 따뜻한 기억의 방으로 임시 대피를 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현실이 너무도 춥고 가혹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분명 존재했던 그 다정함과 여유를 기억 속에서라도 끌어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는

무의식의 처절한 몸부림인 셈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아무런 보상 없이 삭막하게 느껴질 때,

무의식은 강력한 신호를 보냅니다.


여긴 너무 춥고 힘들어. 내가 가장 빛나고 사랑받았던 그 시간으로 잠시만 숨어 있자 하고 말이죠.

결국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보다,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안전한 과거를 가장 포근한 도피처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스스로를 나약한 사람이라 탓하며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그 짙은 향수는,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보려 했던

당신 내면의 가장 눈물겨운 생존 전략이자 치유를 향한 갈망이었으니까요.




오늘 밤, 차가운 현실을 피해 추억의 방에 웅크려 있는 당신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는

안녕하신가영의 <지금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Ulw2CZwkkg&list=RDvUlw2CZwkkg&start_radio=1


생각해 보면 항상 늘 오늘이 힘들었어

어젠 어제여서 힘이 들었고

오늘은 오늘이어서 힘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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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좋았지

나중에 우리 지난 얘기 하지 말고

지금 얘기해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지나 보면 사진 속의 나는 늘 웃고만 있어"라는 이 다정한 가사는,

나쁜 기억은 지우고 안전하고 따뜻한 과거로 숨어드는 우리의 여린 마음을 너무나도 정확하고 깊게 대변해 줍니다.


분명 그 과거의 어느 날들도 그때는 견디기 힘든 오늘이었을 텐데,

우리의 뇌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힘든 기억은 지워버리고 사진 속 웃는 모습만 남겨두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는,

불안하고 버거운 진짜 오늘을 달래기 위해 내 마음이 스스로에게 덮어줄 아주 포근하게 조작된 담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웅크리고 숨죽여 울던 내 안의 아이가, 가장 찬란했던 기억의 옷자락을 붙잡고

제발 나를 좀 위로해 달라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과거에 묶여 있다고 나를 향한 심판을 멈출 수 있습니다.

현실 도피라며 억지로 추억의 방에서 나를 끌어내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밤은 사진첩을 넘기며 그저 과거의 따뜻했던 온기를 마음껏 덮고 쉬어가세요.

그리고 가만히 스스로에게 말해주세요.


아, 오늘 하루가 나에게 너무 차갑고 버거웠구나.

그래서 내 마음이 나를 살게 하려고, 제일 따뜻했던 날의 기억을 꺼내왔구나.


그 애틋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내일의 차가운 아침을 다시 마주할 조그만 온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마음 문장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추운 오늘을 견뎌내기 위해,
내 마음이 스스로에게 덮어주는
가장 따뜻한 기억의 담요입니다.
당신은 오늘,
그 눈물겨운 위로가
간절하게 필요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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