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고요한 밤, 불 꺼진 방안에 홀로 앉아 지워버린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로보는 날이 있습니다.
누군가와의 끝난 관계를 곱씹으며, 혹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 떄문에 속을 끓이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나는 왜 맨날 이런 식일까. 왜 항상 나를 외롭게 하는 사람만 만나는 걸까."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또 똑같은 이유로 상처받고 끝났어."
머리로는 백 번 천 번 다짐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늘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고 비슷한 패턴으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이별을 맞이합니다.
나쁜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들거나,
반대로 나에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안전한 사람은 왠지 매력이 없다며 밀어내 버리죠.
상담실에는 이 지독하게 반복되는 연애의 굴레 속에서 완전히 지쳐버린 분들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은 이 굴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은 무력감과 자기혐오를 느낍니다.
매번 똑같은 이유로 상처받는 자신이 어딘가 심각하게 고장 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U님 역시 파리해진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연애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봐요.
처음엔 너무 좋아서
제 모든 걸 다 내어주는데,
상대방이 조금만 연락이 안 되거나
싸늘해지면 미칠 것 같이 불안해져요.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매달리다가,
결국 상대방이 질려서 떠나게 만들죠.
주변에서는 제발 나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
정작 저에게 헌신적이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저 정말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걸까요.
이렇게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제가
너무 한심하고 싫어요.
시중의 연애 지침서나 얄팍한 심리학 글들은 이런 사연에 아주 명쾌하게 처방을 내놓습니다.
"당신의 애착 유형이 불안형 혹은 회피형이라서 그렇습니다.
건강한 연애를 하려면 안정형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높이고, 나쁜 사람을 끊어내고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세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바른말이 반복되는 이별로 너덜너덜해진 우리의 마음을 진짜 구원해 주던가요.
오히려 안정형이 되지 못한 나 자신을 '결함 있는 사람'으로 깎아내리며
또 다른 자책의 굴레를 만들 뿐입니다.
심리치료의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연애의 패턴을 반복하는 충격적이고도 서늘한 이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보라서, 혹은 자존감이 낮아서 나쁜 연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연애의 패턴을 반복하는 현상은 관계치료의 권위자,
하빌 헨드릭스(Harville Hendrix)가 주창한 '이마고(Imago) 이론'으로 가장 뼈아프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로 '이미지(Image)'를 뜻하는 이마고는, 우리가 어린 시절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무의식 속에
형성한 '부모의 긍정적, 부정적 특성이 모두 혼합된 청사진'을 말합니다.
이마고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이마고'와 가장 닮은 사람,
특히 양육자의 '부정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강력하고 운명적인 끌림을 느낍니다.
머리로는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을 원하면서도, 막상 나를 외롭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심장이 뛰는 것이죠.
우리는 왜 기어이 나를 아프게 할 사람을 찾아내어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우리가 바보 같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과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부모와 닮은 그 사람'을 통해 마침내 보상받고 치유하려는 맹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어리고 힘이 없어서 상처받았지만,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부모를 닮은 저 사람을 내가 완벽하게 변화시켜서 온전한 사랑을 얻어내겠다는
무의식의 처절한 몸부림인 셈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아무 조건 없이 편안하고 다정한 사랑이 주어지면, 무의식은 강력한 경보를 울립니다.
'이거 이상해. 여긴 내가 치유해야 할 상처가 없어. 이건 내가 아는 진짜 사랑이 아니야' 하고 말이죠.
결국 우리는 '낯선 천국'보다 내 결핍을 자극하는 '익숙한 지옥'을 더 안전하고 친숙한 사랑의 맛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똑같은 연애의 실패 앞에서 스스로를 고장 난 사람이라 탓하며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그 불안한 연애 패턴은, 어떻게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려 했던
당신 내면아이의 가장 눈물겨운 생존 전략이자 치유를 향한 갈망이었으니까요.
오늘 밤, 익숙한 지옥 속에서 길을 잃고 스스로를 찌르는 당신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는
정준일의 <안아줘>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3-YekiSLQ4&list=RD13-YekiSLQ4&start_radio=1
상처는 생각보다 쓰리고
아픔은 생각보다 깊어가
널 원망하던 수많은 밤이 내겐 지옥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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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있어줘. 내게 머물러줘
네 손을 잡은 날 놓치지 말아줘
이 노래 속에서 울부짖듯 안아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겉으로는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하며 울고 있는 우리 내면아이의 목소리와 꼭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뻔히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에게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는,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았던 그 간절한 안아줌을 부모와 닮은 누군가를 통해 기어이 받아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숨죽여 울던 내 안의 아이가, 나를 외롭게 하는 그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제발
나를 좀 안아달라고, 이번에는 나를 진짜 사랑해 달라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그 슬픈 굴레를 멈출 수 있습니다.
무의식 속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에게 매달려야만 내가 온전해질 것 같았던 오랜 상처와 이별하는 겁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익숙한 지옥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오늘 밤은 웅크리고 울고 있는 내 안의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팔로 당신이 직접 꽉 안아주세요.
아, 내가 또 무의식 속 부모의 모습을 한 사람에게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갈구하려 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낯설지만 진정으로 안전한 천국을 향해 훌륭한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낯선 천국보다
익숙한 지옥을 선택하곤 합니다.
고통스러운 연애를 반복하는 건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과거의 결핍을 기어이 치유해 보려던
무의식의 간절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눈물겨운 굴레와 작별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