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요?
요즘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20대는 스펙 쌓기와 취업난에, 청장년층은 돈 문제와 상대적 박탈감에, 노인들은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1989년 75%에서 30년이 지난 2019에는 49%로 감소했다고 합니다(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5/2019012501980.html). 예전에는 너도나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삶이 빠듯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분명히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중산층의 정의
중산층이 두터운 국가는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고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도 높습니다. 중산층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OECD는 소득이 중위소득 대비 50% ~ 150% 사이에 있는 계층을 중산층으로 정의합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소득 226만 원 ~ 678만 원 수준이면 OECD 기준으로 중산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달에 226만 원을 버는 4인 가족을 중산층에 포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OECD 기준을 그대로 따르기에는 중산층의 범위가 너무 넓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이 무엇인지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대출 없는 30평 아파트
-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 2,000cc급 이상 자동차
- 1억 원 이상 예금잔고
- 연 1회 이상 해외여행
아파트나 자동차는 크기나 배기량이 같아도 가격이 천지차이이고, 1억 원 이상의 예금이 있어야 중산층이라는 기준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정의 역시 만족스러운 기준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 외국의 중산층 정의를 한번 살펴볼까요?
프랑스, 1969년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 공약집
-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에 능통하고
-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기며
- 악기를 다룰 줄 알고
- 남들과 다른 맛의 별미 요리를 할 수 있고
- 사회운동에 동참할 줄 알고
-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함
미국, 공립학교의 중산층 기준
-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음
영국, 옥스퍼드 대학
- 페어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강할 것
- 불의, 불법 등에 의연히 대처할 것
위 예들을 통해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부를 중심으로 계층을 나누고 있는데 반해, 다른 선진국에서는 시민의식을 기준으로 계층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부를 중심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따로 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 시민의식을 기준으로 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딱히 없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정신의 올곧음과 예의를 강조하던 선비의 나라가 지금은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로 바뀐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진짜 상류층은 단순히 부자가 아니라 지위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고 고학력이라고 해서 모두 상류층이 아닙니다. 돈과 권력이 주어졌다고 아무렇게나 힘을 사용하고 다른 이들을 업신여긴다면, 그런 사람들은 상류층이 아니라 돈 많은 하류인생이거나 진주를 목에 건 돼지일 뿐입니다.
중산층과 행복의 관계를 다루고 있었으니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제 나름대로 중산층의 정의를 새로 내려보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상류층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물질과 정신에서 모두 만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재산의 수준이나 부자의 기준이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 75%나 되는 국민들이 중산층이라 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만족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은 분명히 1989년보다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당시에 자동차는 소수의 전유물이었고 해외여행은커녕 여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부잣집에 가야만 비디오(VCR)를 볼 수 있었고, 여름에 에어컨을 쐬려면 은행에 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방금 나열한 것들의 혜택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으로는 분명히 풍요로워졌는데, 예전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빈부격차와 계층 이동 단절
제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중산층 가정은 대부분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단독 주택이나 아파트에 4인 가족이 살았고 집에는 보통 방 3개와 화장실 1개가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1,500cc 급 국산차가 대부분이고 아이들은 1~2개 정도의 동네 학원을 다녔습니다. 자동차가 2,000cc 이상의 중형차거나 집에 화장실이 2개 있다면 부잣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도 갈 수 있는 학원이 근처에 몇 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정교사를 부르지 않는 이상 사교육의 차이도 크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극소수의 부자와 가난을 면한 다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속해 있는 계층이 어디든 경제의 고성장 덕분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계 상황이 과거보다는 나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소수인 부자와, 생활이 빠듯한 다수, 그리고 어려운 이들로 구성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부자가 늘어나긴 했지만 극소수의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고, 중산층들은 대부분 형편이 빠듯하다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생활이 빠듯하다는 것은 저축할 여유가 없고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부족하는 뜻입니다. 결국 빠듯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계층 구분은 견고해지고 빈부격차는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옛 어른들은 형편이 나빠지면 자신을 탓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형편이 나빠진 사람보다는 좋아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가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은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이 다수인 데다 미래의 희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시대와 나라를 탓하는 경향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빈부격차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소득분배의 악화 속도가 빠르고 농경사회의 품앗이 문화 탓인지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보니, 빈부격차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미래 발전 가능성의 결핍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보다는 다이어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만 보아도 생활수준 자체는 예전보다 개선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한숨소리는 예전보다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일부 어른들은 옛날에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굶지도 않으면서 왜 죽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활수준과 직장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져서 그렇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미래 발전 가능성의 결핍입니다.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나누어 가질 과실이 많았습니다. 남들만큼 노력한다면 제일 좋은 과육은 아니더라도 남은 과실의 일부는 맛볼 수 있을 가능성이 꽤 높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장부터 소득까지 모든 것이 제자리입니다. 성장도 더디고 소득이 늘어날 자리로 가는 문은 비좁기만 합니다. 지금 수준으로 버티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안락함을 누리지 못한다거나 부모보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노력해도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무거운 짐으로 보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
학창 시절에 미국 은행의 IT부서에서 한 달 가량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그들의 발전된 업무 방식이나 업무 능력이 아니라 바로 미국 직장인들의 일반적인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부서장은 40대 중후반의 백인, 팀장 2명은 40대 초반 정도의 인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부서원들은 다양한 인종에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 범위가 매우 넓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나이 많은 사람을 루저(Loser)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팀장이나 부장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종과 나이, 성격과 취향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 각기 맡은 일을 하며 타인의 취향과 인생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승진이 빠르다고 시샘하고 나이가 많으면 뒤처진 것으로 쉽게 판단해버리는 제 자신이 아직도 종종 부끄럽습니다.
과거에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현재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란 개념이 예전보다 매우 모호해졌습니다. 중산층이 얇아진 것도 원인이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가정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졌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매우 풍부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외벌이 남편과 전업주부, 한두 명의 자녀가 전형적인 가족 구성원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외벌이와 맞벌이, 양부모와 한부모, 무자녀와 다자녀, 다문화 가정 등 가족의 모습이 매우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배우 박시은 씨 부부는 대학생 딸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기도 합니다. 집도 단독 주택과 아파트뿐만 아니라 전원주택이나 타운하우스, 원룸에서 오피스텔까지 다양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자동차도 전동 스쿠터부터 집보다 비싼 고급차까지 다양하게 고를 수 있습니다. 교육 역시 홈스쿨링과 대안학교부터 대치동 학원까지 수많은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수많은 다양한 가능성에 자기도 모르게 순위를 매깁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수입이 많으니 외벌이보다는 맞벌이가 좋은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취업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업주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맞벌이보다 소득이 높은 외벌이도 얼마든지 있고, 한 명의 수입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이 맞벌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부자 동네에서는 맞벌이를 부끄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집이 얼마나 어려우면 부부가 모두 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우리는 누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듣보잡 잣대로 자신과 남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명절에 어른들은 관심의 표현이라지만 때로는 무례한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연애는 하고 있니?”, “취업은 했니?”, “더 좋은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에 다들 왜 이리 간섭이야?’ 하지만 막상 결혼 날짜가 잡히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면, 어른들이 물어봐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서운합니다. 만약 그런 기분이 든다면, 시험을 망쳤는데 점수를 자꾸 물으니 짜증 내는 중학생과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남의 간섭이 짜증스럽기 마련입니다. 이를 보면 짜증의 대상은 다른 사람의 간섭이 아니라 불만족스러운 나 자신의 처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 인생이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목표를 이뤘다는 것만으로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행복해지려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드라마 ‘SKY캐슬’의 강준상은 병원장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에 자신이 친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인생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인생이 빈 껍데기만 남았다며 절규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어머니와 남들이 우러러보는 인생을 위해 달려왔다는 것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이 왜 자꾸 모으지 않고 쓰기만 하느냐고 나무라면, 젊은이들은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그 대답이 단지 도망가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참말이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부자는 돈 벌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신이 돈 벌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그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나 보유한 자산에 대해 기쁨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하지만 벤츠를 타고 샤넬 가방을 들어야만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바로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 지출을 합니다.
연예인 지망생은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하지만 연예인 지망생이 스타가 되면, 그 관심이 자신을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유롭게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항상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목표를 달성했는데 왜 행복하지 못한 걸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향해 목표가 자꾸 바뀌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가져야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연예인 지망생이 인기를 얻은 후에도 과거와 같이 인기에 감사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스타가 된 이후에도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팬들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만족이 필요하고, 만족을 느끼려면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변하지 않을 행복의 기준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 기준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누구도 행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부모든 시대든 남만 탓한다면 당연히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면 공부를 해야지, 공부 안 해도 높은 점수를 받는 머리 좋은 친구들만 부러워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빈부격차나 거액의 유산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출발선의 위치가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달려온 여정이 당당하고 가치 있다면, 행복을 느낄 자격은 충분합니다. 지금 수준에서 만족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정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삶의 종류는 전 세계의 인구 수만큼 존재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인생이 존재하고 삶의 방식이 하루가 다르게 다양해지는데, 행복의 기준만 획일적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상류층, 중산층, 빈곤층 따위의 세 가지 분류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한낱 상류층, 중산층 따위에 목메지 말고 무시하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빈곤하기 짝이 없는 몇 개의 분류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했다고 우쭐하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오조오억 개의 분류를 가져온 들 이미 정해놓은 틀에 내 삶을 끼워 맞출 수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잣대 하나로 평가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럴 권리도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끄러운가요? 대부분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기준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온전히 나만의 기준을 찾아 노력할 때 인생도 내 것이 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를 찾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게 되고 머지않아 행복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