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리의 비즈니스 프롬프트 뉴스레터
10/28자 [신대리의 비즈니스 프롬프트 뉴스레터]에서 발행된 아티클입니다.
글로벌 혁신 기업가의 경영 인사이트와 함께 실무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생성형 AI 프롬프트를 매주 엄선해 들려 드립니다.
[구독하러 가기]
귀로 듣고 싶다면 팟캐스트 링크를 클릭해보세요.
얼마 전 한 스타트업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을 더 뽑고, 매출이 늘었는데… 이상하게 다들 더 지쳐만 가요.”
회의는 늘었고, 결정은 늦어졌다.
사람이 많아졌는데, 일은 더디고
돈은 돌지만 ‘이익’은 남지 않았다.
그 대표는 혼란스러워했다.
“우린 분명 성장 중인데, 왜 더 버거워질까?”
그건 성장하고 있다는 착각이었다.
투자를 받고, 매출이 늘어나면 회사가 커진다고 믿었고,
사람이 많아지면 성장이 빨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더 많은 사람이 일할수록, 조직은 더 무거워졌다.
사실 우리 모두 비슷하다.
회사도, 개인도 ‘성장 중’이라 말하지만
그 ‘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회사는 숫자가 늘었다고 안도하고,
직원은 연봉이 올랐다고 만족한다.
하지만 어느새
더 많은 회의, 더 긴 야근, 더 얇은 마진만 남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더 많이”를 외치지만,
이제 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최태원 회장은 단호히 말했다.
“이제는 수출을 늘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인적 자원 중심의 시대의 종언 선언,
그리고 새로운 성장 철학의 서막이었다.
이 글은 그가 제시한
“멈춘 사회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네 개의 엔진”을 따라간다.
1. 사람이 멈춘 사회 — 인재가 떠나는 이유
2. 기술이 바꾼 질서 — AI는 전쟁이다
3. 양보다 질의 경제 — 물건이 아니라 마진을 팔아라
4. 보호의 착각 — 온실 속 기업은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 정말 성장하고 있는가?”
얼마 전 한 대기업 팀장이 퇴사 전날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에선 열심히 해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는 매번 성과를 냈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팀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성과급은 평균, 승진은 대기.
누군가의 실수가 팀 전체의 책임이 되는 구조 속에서
그의 성장은 멈춰 있었다.
한국의 문제는 인재가 없는 게 아니다.
똑똑한 사람이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회사는 여전히 ‘평균의 안정’을 중시한다.
입사 동기끼리 비슷한 속도로 성장해야 하고,
누군가 두드러지면 “너무 튄다”는 말이 돌아온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은 결국 떠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성장을 멈춘 조직의 필연적 결과다.
회사는 말한다. “우리의 인재가 곧 경쟁력이다.”
하지만 그 인재가 떠나는 이유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안정적이지만 변화에 둔감한’ 시스템만 남는다.
최태원 회장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짚었다.
“우리 인재 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회사에 들어오면 평균 이하가 됩니다.”
그는 탓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문제를 냉정히 직시했다.
성과를 내도 보상이 같고, 책임만 늘어나는 구조.
열심히 해도 달라지지 않는 환경.
이제는 그 ‘평균의 안도감’이 성장의 가장 큰 적이 됐다.
성과를 내는 사람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회.
거기서 혁신은 절대 태어나지 않는다.
“왜 뛰어난 사람들은 회사를 떠날까?”
그 답은 단순하다.
머물 이유보다 떠날 이유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조직의 거울이다.
조직이 멈춰 있으면 사람도 멈춘다.
사람이 멈추면, 그 조직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그 ‘공기’ 자체가 바뀌고 있다.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기술이 의사결정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시대.
조직이 아니라 개인의 판단력과 속도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음 파트에서는
그가 말한 두 번째 성장 엔진,
“AI는 버블이 아니라 전쟁이다”를 다룬다.
기술의 흐름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바꾸는 법,
그곳에 한국 사회의 다음 성장 모멘텀이 있다.
얼마 전 한 프로그래머가 퇴근길에 카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내가 짠 코드보다, AI가 만든 코드가 더 깔끔해요.”
말끝에 웃음이 섞였지만, 눈빛은 흔들렸다.
AI가 자기 일을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이건 이제 개발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AI는 버블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위안일 뿐이다.
AI는 지금 누가 살아남을지 결정하는 전쟁이 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단호했다.
“AI에서 밀리면, 회피를 잘했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AI를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건 생존의 문제였다.
AI를 늦게 배우면,
다음 경쟁의 자리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AI가 무서운 이유는 기술 때문이 아니다.
내 일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고,
개인에게는 정체성의 문제다.
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AI에 대한 투자는 군비 경쟁과 같습니다.
이익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패배를 피하기 위한 전략이죠.”
그 말이 곱씹을수록 무겁다.
AI 전쟁은 ‘얼마나 버는가’의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뒤처지지 않는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샘 알트먼은 전 세계를 돌며 이렇게 선언했다.
“300GW 규모의 AI 인프라를 짓겠다.”
말도 안 되는 숫자 같지만,
짓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결국 시장을 만든다.
AI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다.
움직이는 사람만이 기회를 갖는다.
지금 세계는 AI라는 이름의 전쟁터다.
총알은 자본이고, 방패는 기술이며, 전략은 속도다.
한국 기업과 개인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AI를 ‘비용’으로 볼 건지,
‘필수 조건’으로 볼 건지만 남았다.
지금의 AI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배우지 않으면 사라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밀린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다.
AI를 쓰지 않는 사람이 대체된다.
AI 시대는 냉정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공정한 시대이기도 하다.
출신도, 학벌도, 배경도 중요하지 않다.
배우면 된다.
그리고 써보면 된다.
AI는 능력을 증명할 새로운 무대다.
누가 먼저 깨어나서,
이 전장을 자신의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
AI가 만든 효율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그게 다음 전쟁의 주제다.
다음 파트에서는
그가 말한 세 번째 성장 엔진,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마진을 팔아야 한다”를 다룬다.
AI 이후의 세상에서는
많이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를 팔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얼마 전 한 제조업 대표가 이런 하소연을 했다.
“작년보다 두 배 팔았는데, 남는 돈은 오히려 줄었어요.”
생산량은 늘었지만, 이익은 줄었다.
공장은 쉴 틈 없이 돌아가는데,
정작 남는 건 피로감뿐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진짜로 뭘 팔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최태원 회장은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수출액을 늘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린 마진이 높은 걸 팔아야 합니다.”
단순히 더 많이 만드는 건
이제 성장의 답이 아니다.
‘얼마나 많이 팔았느냐’보다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해졌다.
수출로 GDP를 키우던 시대가 끝나고,
마진으로 생존을 지키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다.
대부분의 기업은 여전히 양에 집착한다.
많이 팔면 성공이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 살아남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싸게 많이 파는 기업’보다
‘비싸도 팔리는 기업’을 원한다.
가치를 설계할 줄 아는 회사,
그게 새로운 강자다.
최 회장은 이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는 머리를 써야 합니다.
상품이 아니라, 구조를 팔아야 합니다.”
그가 말한 ‘소프트머니(Soft Money)’는
눈에 보이는 제품이 아니라,
그 제품이 만들어내는 경험과 이야기다.
넷플릭스는 드라마를 직접 만들지 않아도
가장 큰 수익을 가져간다.
왜일까?
‘콘텐츠’가 아니라 ‘구조’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만들든, 어디서 재생되든,
이익은 플랫폼으로 모인다.
한국의 수출 전략도 같아야 한다.
이제는 ‘얼마나 수출했느냐’보다
‘얼마나 가치 있게 팔았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
양적 성장은 한계에 다다랐다.
성장은 더 이상 노력의 총합으로 오지 않는다.
판을 새로 짜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너무나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
많은 기업이 ‘보호’를 기업의 성장의 조건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보호는 안전망이 아니라 족쇄다.
다음 파트에서는
그가 말한 네 번째 성장 엔진,
“보호받는 기업은 자라지 않는다”를 다룬다.
얼마 전 중소기업 대표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늘 정부지원사업에 붙잡혀 있어요.
프로젝트보다 ‘정부 과제 일정’이 더 중요하죠.”
그의 말은 씁쓸했지만, 현실이었다.
지원금이 끊기면 회사가 멈추고,
규제가 풀리면 경쟁이 두려워진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젠 고객보다 공문서를 더 자주 봅니다.”
최태원 회장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지적해왔다.
“작다고 지원받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결과를 내는 기업을 지원해야 합니다.”
그 말은 냉정하지만 정확하다.
한국은 ‘성장을 위한 보호’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보호를 위한 보호’만 남았다.
처음엔 약자를 살리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이제는 약자를 ‘그 자리에 묶어두는 시스템’이 됐다.
과거에는 이런 방식이 통했다.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절엔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장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의 보호는, 곧 정체다.
보호를 받는 동안 경쟁력은 떨어지고,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는
결국 변화를 두려워하는 문화를 만든다.
최 회장은 “성장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과를 낸 기업에 자원을 집중하고,
도전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라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결과를 안 가져오는 정책은 의미가 없습니다.
결과를 낸 사람에게 리소스를 줘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정책 비판이 아니다.
‘보호 중심’에서 ‘성과 중심’으로
정책의 축을 옮기자는 제언이다.
지금의 지원 구조는
결국 모두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성과를 내도 보상이 같고,
위험을 감수해도 나아갈 길이 없다.
최 회장은 이렇게 정리했다.
“성장을 멈춘 사회에서는
누구를 규제할지가 아니라,
누구를 키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규제 완화’가 아니라
‘성장 중심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결국 살아남는 건 에이피알 같이
대기업의 규모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제, 그 시선이 ‘기업’에서 ‘사람’으로 향해야 한다.
보호받는 기업이 자라지 않듯,
보호받는 사람도 성장하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태도다.
“누가 우리를 지켜줄까?”가 아니라,
“우린 스스로 얼마나 더 자랄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성장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것에 가깝다.
그 착각이 기업을 정체시키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착각 1. 사람을 늘리면 성장이 빨라진다.
투자를 받자마자 사람부터 뽑는 회사가 많다.
개발, 마케팅, 디자인, 운영…
모든 포지션이 채워지면
이제는 일이 술술 풀릴 거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회의는 늘고, 결정은 느려지고,
누가 어떤 일을 책임지는지 모호해진다.
사람이 많아지면 속도가 붙는 게 아니라, 조율이 많아진다.
성장은 ‘인원 수’가 아니라, 집중의 방향에서 나온다.
착각 2. AI는 거품이다.
AI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AI는 이미 시장을 재편하고 있다.
개발자가, 디자이너가, 기획자가
하루 만에 교체되는 세상이다.
AI는 기술이 아니라, 기회의 언어다.
그 언어를 먼저 배우는 사람이
다음 세상의 문을 연다.
착각 3. 많이 팔면 성공한다.
한국은 여전히 ‘양’의 논리에 익숙하다.
더 많이 만들고, 더 싸게 팔면
성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익은 줄고, 피로는 쌓인다.
매출은 성장했지만,
정작 ‘남는 돈’은 줄어드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팔린 양이 아니라 남은 이익이 진짜 실력이다.
성장은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현명하게 벌었는가’로 증명된다.
착각 4. 보호는 성장의 조건이다.
보호받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온실은 처음엔 따뜻하지만,
결국 바람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단단해지지 않는다.
보조금이, 제도가, 시스템이
당장의 생존은 지켜줄지 몰라도
도전의 본능은 무디게 만든다.
보호는 때로 가장 교묘한 방해다.
지금 필요한 건 보호가 아니라
실험할 자유다.
우리가 믿어온 건 언제나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옳음’을 너무 오래 붙잡은 곳부터 무너진다.
성장은 틀린 것을 고치는 게 아니라,
익숙한 옳음을 의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요즘 회의실을 보면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위기 이야기를 그렇게 자주 하는데,
정작 누구도 ‘지금 무엇을 바꿀지’ 말하지 않는다.
마치 다 같이 위기를 감지하면서도,
누가 먼저 움직일지는 기다리는 사회처럼 보인다.
한국의 진짜 문제는 위기가 아니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둔감함이다.
기업은 매출이 줄어도 “일시적일 거야”라고 말하고,
직장인은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우린 아직 괜찮아”라며 넘긴다.
그 둔감함이 반복될수록,
우리 사회는 조금씩 ‘멈춘 상태’가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
모두가 비슷하게 안심하고,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속도로 걷는 그 순간,
성장은 사실상 이미 멈춰 있는 것이다.
나는 현장에서 수많은 창업가와 직장인을 만난다.
그들 중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다.
“변화를 먼저 불편해하는 사람.”
AI가 낯설다고 도망치지 않고,
새로운 도구가 어렵다고 미루지 않는다.
그들은 불편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불편 속에 기회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AI를 도입할 땐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AI가 없던 시절엔 어떻게 일했지?’ 싶어요.”
이 한 문장이 모든 걸 설명한다.
혁신은 처음엔 낯설고,
나중엔 없어선 안 되는 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시도할 용기다.
한국 사회가 다시 성장하려면
정부의 정책도, 기업의 전략도, 개인의 태도도
모두 한 방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보호 중심’이 아니라 ‘성장 중심’으로.
‘안정 추구’가 아니라 ‘실험 추구’로.
‘평균에 머무는 안정감’이 아니라
‘변화를 감내하는 긴장감’으로.
성장은 더 이상 거창한 전략이 아니다.
누구보다 먼저 ‘불편함을 감수하고 움직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위기 속에서도 기억해야 한다.
우린 모두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매일 일하고, 매출을 만들고, 목표를 채우니까.
하지만 그건 생존의 증거일 뿐,
성장의 증거는 아니다.
회사 안에서 “안정된 자리”를 찾는 순간,
그 자리에서부터 성장의 멈춤이 시작된다.
실패의 리스크를 줄였다고 안도하지만,
그건 사실상 성장의 리스크를 포기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말했다.
“결과를 내는 사람에게 리소스를 몰아줘야 한다.”
이 문장은 국가의 경제 철학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다.
스스로 결과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성장은 보호가 아니라 책임에서 시작된다.
“나는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성장은 거창한 도약이 아니다.
그건 매일의 선택이다.
오늘도 불편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안전함에 머물 것인가.
그 선택이 당신의 내일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