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데카콘 '캔바 (Canva)' 멜라니 퍼킨스 창업스토리 4탄
"포토샵이 얼마나 무거운 프로그램인지 알지? 수십 개의 레이어, 기가바이트 단위의 고해상도 이미지, 수백 개의 폰트 데이터. 그 거대한 프로그램을, 아무런 설치도 없이 인터넷 브라우저 위에서 돌리는데, 단 1초의 버벅거림도 없어야 한다고?"
호주 시드니 서리 힐스(Surry Hills)의 낡고 좁은 사무실.
어렵게 합류한 구글 출신의 천재 엔지니어, CPO 카메론 아담스의 창백한 얼굴 위로 듀얼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일렁였다. 바닥에는 빈 에너지 드링크 캔이 굴러다녔고, 공기 중에는 식어버린 피자와 진한 에스프레소의 냄새가 찌들어 있었다.
한 철학자가 예술과 노동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통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루브르 미술관에 걸린 매끄럽고 우아한 명작 앞에서 숨 막히는 경외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한 폭의 그림을 잉태하기 위해 작가가 홀로 겪어내야 했던 피비린내 나는 스케치의 수정과, 찢어버린 캔버스의 잔해, 그리고 처절한 절망의 흔적이 관람객의 눈앞에서는 완벽하게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정한 의미의 '단순함(Simplicity)'이란 결코 처음부터 단순하고 우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의 '복잡성'을 마주하고, 그것을 뼈를 깎는 고통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통제해 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승리이자 전리품이다.
이제 막 실리콘밸리의 시드 머니를 연료로 삼아 출항한 캔바의 작은 돛단배 앞에는, 바로 그 위대한 단순함을 브라우저 위에 구현해 내야 하는 잔혹하고도 캄캄한 기술의 늪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의 디자인 프로그램들은 무거운 하드디스크의 용량과 거대한 CPU의 연산 능력을 무자비하게 독점하며 돌아가는 무거운 제품들이었다.
반면 캔바가 세상에 내놓아야 할 제품은, 낡은 노트북에서도 그저 인터넷 창 하나만 띄우면 수백 개의 이미지와 일러스트가 깃털처럼 가볍게 드래그 앤 드롭으로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전 세계의 사용자들이 동시에 접속해 하나의 캔버스를 실시간으로 편집하는 동기화 기술까지 구현해야만 했다.
당시 2012년의 HTML5와 자바스크립트가 가진 클라우드 엔지니어링의 한계선을 아득히 넘어서는, 사실상 기술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미친 미션이었다.
카메론이 이끄는 소수 정예의 개발팀은 1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햇빛조차 보지 못한 채, 마치 심해로 가라앉은 잠수함의 승무원들처럼 캄캄한 코딩의 바닥을 기어 다녔다.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메모리가 새어 나가는 누수 현상이 발생했고, 브라우저는 연산량을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수십 개의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고, 또 정확히 그 개수만큼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에러 코드가 모니터를 새카맣게 뒤덮을 때마다, 비좁은 사무실에는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무겁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당면한 기술적 난제보다 개발팀의 숨통을 더욱 강하게 옥죄는 것은, 다름 아닌 CEO 멜라니 퍼킨스의 강박에 가까운 완벽주의와 집착이었다.
"수정 하자. 아직도 너무 복잡해. 불필요한 단계가 두개나 들어가 있잖아."
멜라니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이나 양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메론이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기적처럼 브라우저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현해 낸 놀라운 렌더링 기능 앞에서도, 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용자가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쓰레기였다.
"멜라니, 제발.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해. 지금 당장 MVP(최소 기능 제품)로 시장에 내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고. 런웨이가 얼마 남지 않았어. 남은 현금도 무서운 속도로 소진되고 있다고!"
재무와 운영을 담당하던 클리프가 피가 마르는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말렸지만, 모니터를 응시하는 멜라니의 눈빛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절대 안 돼. 캔바에 처음 접속한 사람이 튜토리얼도 없이 직관적으로, 단 '5분' 안에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디자인을 완성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철저한 실패작이야. 우리는 어도비의 하위 호환 버전이나, 그저 '조금 더 쓰기 편한 포토샵' 따위를 만들려고 100번의 거절을 당하며 이 고생을 한 게 아니야. 우리는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던 디자인의 권력을 전 세계 대중의 손에 쥐여주는 해방구(Liberation)를 만드는 거라고."
'5분의 룰'.
그것은 캔바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유일무이한 이유이자, 그 어떤 자본의 압박 앞에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과도 같았다.
통장의 자본은 땔감처럼 타들어 가고,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간간히 이메일을 보내 언제쯤 베타 버전을 볼 수 있을지 넌지시 물어오기 시작했다. 활자 뒤에 숨은 그 정중한 재촉은 때론 숨이 턱턱 막힐만큼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든 빨리, 대충 돌아가는 제품이라도 출시해 이 숨 막히는 불안감을 지워버리고 싶은 유혹이 매일 밤 악마의 속삭임처럼 멜라니와 클리프의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불완전한 타협물로 세상과 적당히 거래하느니, 차라리 런칭을 끝없이 미루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고통스러운 완벽주의의 길을 택했다.
사용자가 마우스 클릭을 한 번 덜 하게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백엔드 서버에서는 수천 줄의 복잡한 코드가 며칠 밤에 걸쳐 새롭게 짜이고 융합되었다.
사람들이 그저 화면을 보며 '와, 정말 직관적이고 쉽네'라고 느끼는 그 1초의 찰나의 마법을 선사하기 위해, 호주의 좁은 사무실 안의 개발팀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시스템 아키텍처를 갈아엎고 또 갈아엎었다.
마침내 2013년 8월.
1년이 훌쩍 넘는 지독하고 처절했던 사투 끝에, 캔바의 첫 번째 공식 베타 버전이 세상의 빛을 볼 모든 준비를 마쳤다.
실리콘밸리의 잘나가는 거대 IT 기업들처럼, 출시와 동시에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을 도배하거나 수십억 원의 화려한 퍼포먼스 마케팅을 쏟아부을 예산 따위는 캔바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제품 자체가 스스로 영업사원이 되어 성장하는 '제품 주도 성장(PLG, Product-Led Growth)'과, 사람들의 자발적인 입소문 바이럴에 회사의 명운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 극도의 희소성을 무기로 한 '대기자 명단(Waiting List)' 페이지를 인터넷에 조용히 오픈하고, 숨죽인 채 세상의 반응을 기다렸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었지만, 세상이 이 도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1년은 짠내나는 우주 쓰레기가 될 터였다.
운명의 런칭 당일.
시드니 본사의 작은 사무실 안. 멜라니, 클리프, 카메론 세 사람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키며 모니터 중앙의 실시간 트래픽 대시보드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이, 이름 모를 스타트업이 만든 이 낯선 웹 브라우저 디자인 도구에 관심을 가져줄까?'
'만약 접속자가 100명도 채 안 되면 어쩌지? 투자자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
피 말리는 정적을 깨고, 0에 멈춰 있던 대시보드의 숫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00명.
500명.
3,000명.
10,000명…….
세 사람의 동공이 미친 듯이 확장되었다.
숫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마치 고장 난 계기판처럼 미친 듯이 치솟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미치도록 복잡하고 턱없이 비싼 디자인 프로그램의 권력 아래 짓눌려 있던 전 세계의 학교 교사들, 영세한 빵집 사장님들, 스타트업 마케터, 소셜 미디어 관리자들이 '누구나 브라우저에서 무료로 완벽한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소문을 듣고 마치 어린아이들 처럼 캔바의 웹사이트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입소문은 그 어떤 마케팅 자본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불처럼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정식 런칭의 서버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베타 서비스의 대시보드에는 무려 '5만 명'이라는 경이롭고 압도적인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세상에…… 카메론! 멜라니! 이것 좀 봐! 트래픽이 우리가 예측했던 최대치의 수십 배를 넘어가고 있어!"
클리프가 모니터를 짚으며 경악에 찬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토록 차갑고 냉정했던 멜라니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고,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삐- 삐- 삐- 삐-!!
사무실 구석의 서버 모니터링 시스템에서 붉은색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미친 듯이 솟구치던 대시보드의 숫자가 심정지 환자의 심박기처럼 일제히 싸늘하게 멈춰 섰다.
전 세계 190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거대한 트래픽의 쓰나미.
아직 트래픽 최적화가 덜 끝난 캔바의 초기 클라우드 인스턴스들은, 새로운 서버가 부팅되어 투입되기도 전에 그 어마어마한 접속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뻗어버린 것이다.
화면 한가운데, 방금 전까지 축제의 현장이었던 캔바의 랜딩 페이지 대신 절망적인 HTTP 상태 코드 하나가 창백하게 떠올랐다.
[ 503 - Service Unavailable ]
1년이 넘는 뼈를 깎는 고통과 100번의 거절 끝에 마침내 맞이한 영광의 런칭일.
축포와 함께 날아 올라야 할 세상의 무대는,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모니터 앞에 선 세 사람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설레는 마음으로 접속을 했던 초기 유저들이, 당장이라도 트위터를 켜고 캔바를 향해 지독한 혹평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한번 돌아선 초기 유저들의 마음은 두 번 다시 스타트업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 압도적인 접속자 수는 훗날 세상을 지배할 위대한 시각 제국의 위대한 탄생일까, 아니면 서버 다운과 함께 차갑게 조롱받으며 사라질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시작일까.
사무실을 채우는 붉은 경고음 사이로, 카메론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