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양귀자

두 가지 모순을 발견하다

by Growth With Me



(본 글은 책에 대한 스포일러 내용이 담겨 있으니 책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기 바랍니다!)






새해가 왔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한 해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무덤덤할 뿐이다. 연말이라고 해서 부산스러울 것 없고, 또 새해라고 하여 큰 기대도 없다. 삶이 무탈하길 바랄 뿐이다.


지난해 11월, 12월에는 연말 모임이 거의 없었다. 애써 약속을 잡지 않았고, 정말 극소수의 친구를 제외하곤 만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과만 사적으로 만났는데 그들 모두가 내게 하는 말은 '더 이상 초롱초롱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5년 전 적어도 10년 전의 나는, 희망차고 매우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 당시의 나는 현실을 부회하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두 발을 현실에 굳건히 딛고 있다. 반면 큰 희망, 원대한 꿈 등은 삶에서 희미해졌다. 그렇다고 비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의기양양하거나 설렘에 부풀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도전을 하는 중이고, 뒤늦은 나이에 새롭게 시작한 기술정책학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있다. 3년 내에 박사학위를 받고 다수의 논문을 써내는 것이 목표다. 난 계속 안주하지 않고 변화해가며 새롭게 성장하고 있으며, 작지만 의미 있는 연구 결과물을 만들어, 조금이나마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줄 것이다. 다만 내가 기대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어렸을 땐 100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1이 될까 말까 하다. 비관적으로 변했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변한 것이라 믿고 싶다.


각설하고, 12월에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모순'이란 책을 새해가 되어 완독했다. 작년부터인가 교보문고에 들리면 '모순'이란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것을 보고, 내 어린 시절에 유행했던 소설이 왜 다시 역주행하고 있는지 궁금했다(완독하고 찾아보니 다수의 유튜버들이 자신의 인생 책으로 꼽아서 대중에게 다시금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안진진'이라는 25살 결혼적령기(?) 여성의 1년여의 삶을 그리고 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25살 여성이 결혼적령기라니?'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발간되던 1998년은 그랬었다. '안진진'이라는 주인공 여성은 결혼으로 인해 삶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쌍둥이 엄마와 이모를 두고 있다. 주인공의 엄마는 폭력적이고 무능한 아버지를 만나 전투하듯 살아가며 두 자식을 건사하며 키워냈다. 반면 주인공의 이모는 매우 책임감이 강한 유능한 남편을 만나 고상하고, 우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과 엄마를 포함한 두 자매의 삶, 남동생, 이모부, 이종사촌들의 삶을 하나씩 조망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현재 그녀 곁에 없다. 아버지는 술과 폭력을 일삼다가 주인공이 자라나면서 긴 시간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결국 5년째 집에 돌아오고 있지 않다.


한편, 주인공에겐 결혼 대상으로 꿈꾸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나영규)는 매우 계획적이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회적으로도 능력을 갖춘 남자다. 다른 남자(김장우)는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며, 가정 환경이 그리 순탄치 않은 주인공과 닮은 구석이 많은 남자다. 발전해 가는 두 사람과의 관계를 따라가며 주인공이 어떤 남자를 선택할지 예측해보는 것도 이 책의 감상 포인트이다.


자세한 서사는 책의 세밀한 행간으로 확인했으면 하고(소설은 글을 씹는 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번역된 외국 문학보다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수 있는 한국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결론을 말하자면 주인공의 엄마는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불행 속에서도 힘차게 삶을 이어나간다. 충격적이게도 이모는 무료한 행복 속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이것이 작가가 제시하는 소설 속 첫 번째 '삶의 모순'이다.


작가가 던지는 두 번째 '삶의 모순'은 주인공이 결국 가슴이 끌리는 즉흥적이고도 감성적인 남자를 포기하고, 이모부와 같이 계획적이고, 현실적 능력을 갖춘 남성을 선택해 결혼한다는 점이다. 이모의 무탈한 행복이 자살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고도, 결국 그녀와 유사한 삶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삶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을 읽으며 특히 들었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아끼는 순수하고도 영롱한 마음과 '주식'의 낙폭을 관찰하며 최저점에서 매수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마음 모두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이다. 내 20대와 30대 초반까지는 이 두 마음은 매우 모순된다고 생각하여 한쪽으로 완전히 경도된 삶을 신념 있게 살았다. 하지만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내가 만든 깔끔한 신념의 테두리 내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이제는 매일 모순된 감정과 행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모순 덕분에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균형을 잡아나가며 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이모부에 각각 대응하는 사람이 김장우와 나영규가 아니었을까? 진진이는 쌍둥이였던 엄마와 이모의 삶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던 결혼 앞에서 1년 동안 재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 불행으로 점철된 선명한 삶을, 이모는 책임감 넘치는 이모부를 만났지만 무료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진진이는 자신의 삶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이모가 걸었던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 같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글귀는 다음과 같다.



p.104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p.127 생선살 한 젓가락 우리에게 떼어주기를 아까워했던 이모부지만 아버지의 사업 자금으로 갈치 백 마리, 아니 천 마리만 마리 살만한 돈을 빌려주었고 결국 돌려받지 못했어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을 어머니는 왜 잊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중략)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56 어머니는 이 불행을 해결하는 데 온갖 신명을 다 내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절규를 하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과장법은 이렇게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부풀려놓은 불행에서 이처럼 맵시 있게 빠져나오는 어머니, 8월에 보는 어머니는 역시 과장법의 대가였다.



p.22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p252 어제 아침엔 이러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나요.



p.283 진진아. (중략)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p.302 작가의 말 중 -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1


대학 입학하기 전 시각장애인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책을 녹음한 자원봉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책의 내용과 음성 내용이 동일한지 검수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그 활동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책 내용 중에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에 관한 내용을 보고 '아, 이 책을 검수했었지'라고 불현듯 떠올랐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활동하던 그런 시절도 나에게 있었다.



#에필로그 2


그런 의미에서 헤어진 다음날을 들어야겠다.ㅋㅋㅋ 매우 어린 시절에 TV에서 많이 흘러나온 노래였는데 겨울 감성에 딱 맞는 노래인 듯하다.

https://youtu.be/DmXe-w56mAo?si=sqUg0J_kHgaIHMKw





#에필로그 3

책을 빌려본 학생들의 댓글 배틀 ㅋㅋ 나도 뒤이어 새 쪽지를 남겼지만 그 내용은 비밀.




작가의 이전글위스키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