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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운 Jul 19. 2023

재시작하는 글쓰기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달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든 일들이 있었고, 피로감이 잔뜩 쌓였다. 이 글은 다시금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해 굳어있던 뇌와 손을 푸는 글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깨달은 단편적인 내용들을 다룬다. 각각의 꼭지를 나중에 한 편의 글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깨달음, 중국식 물고문

중국식 물고문은 대상자를 저항할 수 없게 묶어두고 정수리나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이 천천히, 끊임없이 떨어뜨리는 고문 방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지는 고문들에 비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식 물고문이 며칠 동안 지속되면 점점 심해지는 스트레스와 피로, 무기력감으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리고 경우에 따라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얻게 된다고도 한다.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지는 고통은 신체의 훼손의 고통해 비하면 우스울 만큼 가벼울 것이지만 그게 며칠, 몇 주나 지속된다면 도무지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강도뿐 아니라 지속되는 길이에도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관리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소하게 피곤하고 불쾌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때가 있다. 매일매일은 조금 피곤한 정도지만 그런 날이 끝없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 마음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시점이 온다. 바로 이게 번아웃인 걸지도.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할 때 지금 당장 혹은 오늘 하루를 기준으로 생각할게 아니라, 최근 일주일 혹은 한 달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스스로의 감정 상태와 피로감이 어때했는지를 살피는 편이 좋다. 매일은 견딜만했지만, 그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다면 중국식 물고문을 받는 사람처럼 어느 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


두 번째 깨달음, 닥치고 있는 게 낫으려나?

입 닫게 만드는 분위기를 종종 느낀다.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인터넷 유행어로 '국평오'라는 말이 있다. '국민 평균은 오 등급'이라는 말의 줄임말인데, 수능시험에서는 가운데 등급인 5등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가장 많고 1등급과 9등급에 해당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정규 분포 형태로 등급을 매기는 것을 두고 나온 말이다. 수능 시험의 결과로 5등급을 받았다고 하면 공부에 전혀 손대지 않고 생각 없이 학창생활을 보낸 학생이 연상되는데, 바로 그런 인간상이야 말로 고등학생 전체를, 혹은 한국 전체를 대표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논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다. 국민 평균은 오 등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양심적인, 비상식적인 일들이 종종 발생하는 것 같다. 이건 그동안 머리로 이해하고 있던 내용이다. 최근에는 이걸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의견을 제시한 이후에 논의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닥치고 있는 게 낫으려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겪은 상황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 의견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답변하기

가벼운 마음으로 떠올린 생각을 제시하자마자 대법관이라도 된 양 그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대법관 빌런"이라고 부르자. 대법관 빌런들은 정말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세상에 나오기라도 한 듯 패턴이 비슷한데, 타인의 의견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고 반박 과정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 또한 일반적이다. 대법관 빌런은 사람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해당 분야에 한해서 대법관 빌런이 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두 번째 유형, 논지 파악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말하기

나는 모든 대화가 나름대로 목적을 갖고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기분대로 아무 말이나 하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집단적 독백이 아닐까? 대화의 목적이나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본인이 내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점점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을 "아무 말 빌런"이라고 부르자. 아무 말 빌런은 정말 아무 말이나 하기 때문에 특정한 패턴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보겠다.


대화의 주제; 모임 장소를 정하기

A: 홍대 근처에서 모이는 게 어때?

아무 말 빌런: 전에 홍대에서 놀았을 때 생각나네.


이런 식이다. 상대방의 의견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의미 있는 추가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화 맥락을 무시한, 하지만 어떻게든 연결 고리는 있는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다. 아무 말 빌런이 진화하면 근거 없는 추측을 아무렇지 않게 대화에 섞어 넣기도 한다.


대화의 주제;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의견 교환

A: IAEA도 오염수 방류를 문제 삼지 않고 있는데, 반대하는 근거가 뭘까?

아무 말 빌런: 그건 일본 국민들도 싫어할걸?


아무 말 빌런은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거나, 의견을 교환해서 더 좋은 결론을 도출하는데 관심이 없다. 아무 말 빌런은 대화 자체, 혹은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경험을 즐기기 위해서 대화에 참가한다. 나로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대화 상대이다.


세 번째 깨달음, 삶은 운동을 모방한다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Life imitates art)는 유명한 어구가 있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삶은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사람마다 신체 능력은 제각각이지만 그럼에도 공통점은 존재한다. 근력, 지구력, 유연성 등 신체 기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스스로의 한계는 본인이 힘들다고 느끼는 지점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힘들다고 느낄 때까지 운동을 한 후 마무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체력이 늘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지점과 체력의 한계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생각했겠지만 본인의 체력의 한계에는 도달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 체력을 키우고 싶다면 힘들다는 생각,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극복하고 좀 더 스스로를 밀어붙어야 한다.




마치며

글쓰기는 스스로와의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을 가리켜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는데 정작 스스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게 관찰하는 때가 글을 쓰는 순간 이외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당신도 나와 함께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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