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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결 Apr 10. 2023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무슬림에 대한 모욕인가?

ㅤ대구시 북구 대현동에서 벌어진 일은 세간의 이목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이주민들은 그곳의 인근 부지를 매입해 모스크를 짓고자 했는데, 지역 원주민들은 주거지에 종교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북구청은 주민들로부터 집단적인 민원이 제기되자 건축주를 상대로 공사를 중단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건축주는 공사중지명령을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법원에 제소했다. 결과적으로 구청과 주민들은 소송에서 패소했고, 작년 9월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판결이 확정됨에 따라 더는 건축 공사에 대한 법적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 방식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슬람교의 예배당이 건립되고 있는 공사현장 인근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것이었다.*1) 공사장 앞 주택은 신자들의 임시 기도소였다.*2) 물론 그들의 항의 시위는 “대현동 주민들을 위한 연말 큰잔치”라는 이름으로 치러졌지만, 행사가 치러진 장소와 주최자만 보아도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누구를 겨냥했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ㅤ진보 성향의 언론사들은 주민들의 이러한 행동이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 혐오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도했고, 시민단체들 또한 이와 동일한 견지에서 주민들을 비판했다. 반면, 돼지고기를 먹은 것 자체가 문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개진되었다. 한식 가운데 삽겹살을 으뜸으로 치는 한국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은 사람에게 무슬림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은 마땅히 고유한 식생활을 존중받아야 할 원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한 일이라는 것이다.*3) 소셜미디어에서도 비슷한 논지의 주장을 찾을 수 있다. 그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주민들의 의도가 고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돼지고기를 구워먹은 행위를 잘못으로 여길 수는 없다고 본다. 요컨대, 알라를 믿지 않는 한국인이 무슬림 앞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에 대한 괴롭힘이나 차별이 아니라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ㅤ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다고 느끼기는커녕 전혀 그럴듯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놀라웠다. 내가 그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여긴 까닭은 사건의 전후 사정과 더불어 “사상” 그리고 “표현” 사이에 존재하는, 어찌보면 둘 사이에서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관련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한 칼럼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겨운 사례를 상기하도록 함으로써 “악한 의도”와 “섭식”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할 때 극우들은 유가족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뜯었다. 그것은 단지 배고픈 사람이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행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게 유족들에 대한 모욕으로 인식되었고, 공중은 그들의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지탄했다. 이 칼럼을 쓴 사람은 잔치를 즐긴 주민들의 행동이 형태적으로 8년 전 극우세력의 “폭식시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비록 칼럼에서 주민과 극우가 보인 행위의 유사성을 “형태적”인 측면에 한정하기는 했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세부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단순한 평면적 비교에 곧바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ㅤ다만 나는 이 사안에서 앞의 칼럼을 비롯한 다른 비판들이 내세우는 기본전제를 수용한다. 그 전제란 어떤 행위를 평가할 때 그것의 의도를 배제하지 않는 관점이다. 어떤 특정한 행위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처럼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유럽에서 오른팔을 치켜들거나(nazi salute) 미국에서 십자가를 불태우는 것(cross burning)이 대표적이다.*5) 반대로 의도가 사악하더라도 행위가 그 의도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을 살해할 목적으로 커피에 설탕을 적정량보다 한 스푼 더 넣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문제는 확답하기 애매한 사례다. 이를테면, 건강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담뱃불을 붙여주는 행위는 어떤가? 행위자가 의도를 말하지 않는 이상 정작 불을 빌린 흡연자는 고맙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 지금 마주한 사건은 그렇게 난해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무슬림이 교리상 돼지고기를 기피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주택가에 모스크가 건립되는 것을 저지하기로 마음먹고 공사장 인근에서 돼지고기를 구웠다.

ㅤ삽겹살이 한국의 일상적인 식재료라는 반론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타당할 것이다. 한국인과 무슬림이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모처럼 고향인 부산에 방문한 한국인은 돼지국밥을 주문했고, 무슬림은 교리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에 해물탕을 시켰다. 여기서 한국인이 돼지국밥을 주문한 것은 무슬림에 대한 멸시와 조롱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의 근저에는 “돼지국밥 진짜 맛있겠다”라는 생각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무슬림을 향한 경멸”이라는 고정된 의미를 지닌 행위도 아니다. 따라서 샤리아(sharia)나 파트와(fatwa)가 돼지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든, 같이 식사했던 무슬림의 기분이 개인적으로 언짢았든 상관없이 돼지국밥을 주문한 행위에 차별적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ㅤ주민들에게 비판이 가해지는 까닭은 그들의 행위를 의도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고의와 부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돼지국밥을 시킨 사람은 겉보기에 배고픈 것일 수 있으나, 속으로는 무슬림을 시험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종종 사람들의 동기는 불명확하며 복합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사실적 심사(counter-factual test)를 전제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를 판별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협소한 기준이다. 어떤 행위가 상대에게 의도한 자극을 주지 않을 때도 행위자는 그 같이 행위했을까? 만약 훈연을 물씬 풍기면서 돼지고기를 구워먹을 때 무슬림이 그 관경을 보고 즐거워할 것으로 예상됐다면 주민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슬림을 도발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라면, 예컨대 붕어빵을 굽는 것은 무슬림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므로 주민들은 굳이 “붕어빵 한마당”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ㅤ누군가는 여전히 내가 의도와 방식을  혼동한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한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가학성이 의도에 포함되어있는지, 아니면 방식에 포함되어있는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를테면, 나의 논변은 의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에 집착하지만, 주민들이 사용한 방식도 독자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괴롭힘”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민들의 행동에 무슬림이 불쾌감을 느꼈을지라도 주민들이 그 행동으로 무슬림을 괴롭혔다고 비판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보통 문제시되지 않는 행동도 상황에 따라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예컨대, 외국 회사에 취직한 한국인이 직장 내에서 다수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때 주동자가 그에게 마늘 한 접을 준다면 아무리 마늘 소비량이 세계 최고로 꼽히는 한국인이라도 그 행동을 인종차별적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지 동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ㅤ불쾌한 예시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유럽의 어느 국가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갔다. 학생은 진열대에 놓인 상품을 둘러보고 정육점 주인에게 말했다. “이 고기로 주세요.” 그러자 정육점 주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네한테 판매할 고기는 없습니다.” 학생은 당황하며 물었다. “판매 중인 상품이 없나요?” 정육점 주인이 답했다. “우리 가게는 개고기를 안 팝니다.” 정육점 주인의 언동은 흔히 한국인이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편견에 근거한 인종차별이다. 그러나 개고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 그 자체는 특정한 인종에 대한 비하나 경멸을 직접적으로 암시하지 않는다. 교양 있는 시민들로부터 비난받는 잘못된 선언들 상당수도 그렇다. “성전환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죄악이다”,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에는 북한이 개입되었다”,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받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이 주장들 중에서 어느 것도 “젠신병자”, “착홍죽홍”, “한남충”처럼 그 자체로 모욕적인 표현은 없다. 만약 위 예시에서 정육점 주인이 그저 가게 방침을 설명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엉뚱하고 황당한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ㅤ일각에서는 주민들을 향한 비판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부정적 측면에 소홀하고 싶지 않지만, 여기에 다른 부당한 사례처럼 순전히 비판을 가장한 억지만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최근 미국의 한 사립 대학에서 무함마드가 그려진 700년 전 삽화를 예술사 강의 자료로 사용한 교수가 이슬람 혐오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6) 이 사건은 광신적인 도덕주의자들의 패악질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대구에서 마주한 사건도 그런가? 교수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흑인 학생을 가리켜 “깜둥이”라고 부르는 것과 역사 수업에서 과거의 지독한 인종주의적 관행을 설명하면서 백인들이 그런 멸칭을 사용했다고 언급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없다면, 주거지에 종교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조만간 이슬람교 예배당이 지어질 임시 기도소 앞에서 통돼지로 잔치를 벌인 행동은 전자와 후자 가운데 어느 쪽에 근접한가? 의도가 뚜렷하지 않아서 우리는 자비의 원칙과 관용적인 태도에 입각해 주민들의 선의가 최대한 부각되도록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민들을 무조건 차별주의자로 낙인찍고 악마화하는 것은 부당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도 잘못이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다소 기이하다.

ㅤ특히 의도와 행위, 곧 생각과 표현을 분리하여 관찰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기시감을 느꼈다. 혐오표현(hate speech)의 범죄화나 발언규범(speech code)의 도입을 옹호하는 이들도 그와 비슷한 전략을 내세운다. 혐오표현을 법률적으로 금지하자는 요구에 맞서는 유력한 논변들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법적 규제가 특정한 표현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그 표현으로 나타난 개인의 신념, 취향, 세계관 등을 스스로 검열하도록 하기 때문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를 적절히 양보함으로써 평등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법적 규제를 통해 가장 극단적인 독설의 형태에 해당하는 “표현”만 제한될 뿐, “사상”이 침범되지는 않는다고 강변한다. 즉, “사악한 생각”와 “사악한 표현”을 서로 준별해야 하고, 증오발언금지법이 규제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후자라는 것이다. 이 준별은  “의도”를 비난할 수는 있으나 “행위”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보는 위 논변과 동일한 전제다. 그 견해는 “못된 의도”와 “행위”를 구분해야 하고, 비난의 대상은 오직 전자라고 본다. 그러나 사상과 표현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더라도 둘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7) 이 점이 수긍된 이상 구체적인 사건을 비평할 때 특정한 행위를 그것의 의도로부터 단절시켜 파악하는 관점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단순히 일상적으로 보이는 행위조차도 전후 맥락이 드러날 때는 가치중립적 상태에서 벗어나 어떤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포착될 수 있다. 따라서 혼동은 관계적인 측면에서 행위(표현)와 의도(생각)를 연관 짓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표현과 생각의 개념적 구분을 그것들 사이의 관계까지 확장해 적용하는 사고에서 비롯한다.

ㅤ내가 주민들의 행동이 품위 없고 도의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무슬림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가 아니다. “연말 큰잔치”는 항의의 의도로 기획되었으며, 공사장 출입구에 돼지머리를 전시하고 바비큐 파티를 벌인 것은 무슬림을 표적으로 삼아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멸시하고 정신적 고통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 사건은 단지 동네 주민들끼리 유쾌한 송년회를 한바탕 벌이기로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준비된 음식이 돼지고기밖에 없어서 무슬림이 서운했다는 해프닝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겹살과 보쌈, 족발은 한국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요리지만, 무슬림과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돼지고기를 그들 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행태는 유치하고 비열한 짓이다.

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의견이 과장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혐오표현은 부도덕한가? 혐오표현을 규제할 것인가? 그리고 정부에게 혐오표현을 금지할 권한이 있는가? 이 물음들은  서로 무관하지는 않으나 각기 다른 차원에서 제기되며, 이에 대해서는 상이한 대답이 가능하다. 나는 이 글의 주제가 된 사례에서 주민들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너무 위험하거나 끔찍해서 혹은 특정한 종교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평판을 훼손하기 때문에 그런 유형의 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의심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오욕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각자 믿음에 따라 의견을 표하는 것은 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도덕적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주로 입법과 정책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결정된다. 일상에서 자신의 신념이나 선호, 편견을 드러냄으로써 도덕적 환경에 기여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 집단적 결정을 강제하는 것은 불공정하다.*8)

ㅤ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개인과 개인 간의 태도가 아니라 정부가 개인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사려 깊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공권력을 빌어 그 태도를 강제할 경우 예의범절은 단순히 사람들, 곧 나와 당신이 아닌 개인과 정부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된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 주제를 다룰 계획이므로 당장 애써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요점만 밝히자면, 나는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유형의 법적 규제가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며 민주적인 정부에게는 혐오표현을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 본다. 또한, 혐오표현이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ㅤ어쨌거나 돼지머리를 전시하고 바비큐로 잔치를 벌인 것이 세상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 퍼포먼스는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이 다른 이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자유의 신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주장의 내용이 타당한지와 그런 내용을 주장할 자유가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나는 무슬림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은 행동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할 자유가 억울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다. 실은, 이 사건에서 정말 불쾌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경북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이 대학 서문 벽면에 “연말 큰잔치”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려 하자, 이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주민이 그들을 가로막고는 이윽고 대자보를 빼앗아 뭉개버렸다. 재작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모스크 건립에 반발하는 내용의 현수막과 벽보를 철거하라고 권고했을 때 주민들은 위원회를 규탄하며 그 결정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여겼다. 그러니 우습게도 반대자의 견해를 짓밟은 그 적나라한 압제는 자유를 갈망했던 주민들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이후 자신들을 향한 반대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주민들의 손에 의해 재현된 꼴이 되었다. 하나, 우리가 여기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우습기보다는 절망적일 것이다.


Jan 14, 2023


* 대표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이 글은 또한 나의 개인 블로그에 게시되었다. (최초발행: Jan 14, 2023)


1) 황수빈, “대구 이슬람사원 공사장 앞 '통돼지 바비큐 잔치' 논란,” 연합뉴스 (2022년 12월 15일)


2) 김규현. “통돼지 40인분 구우며 폭언…‘이슬람 혐오 잔치’ 벌인 주민들,” 한겨레 (2022년 12월 15일), 12면 1단


3) 김상기, “인권과 돼지 바비큐,” 국민일보 (2022년 12월 29일), 31면 1단


4) 한승훈, “대구 이슬람사원보다 ‘돼지머리 시위’가 더 위험하다,” 한겨례 (2023년 1월 2일), 27면 1단.


5) 십자가 소각은 미국에서 KKK가 유색인종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이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판례로는 R.A.V. v. City of St. Paul, 505 U.S. 377 (1992)


6) Vimal Patel, “A Lecturer Showed a Painting of the Prophet Muhammad. She Lost Her Job,” The New York Times (Jan 8, 2023)


7) 남미영, “월드론의 혐오표현 규제옹호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철학적 분석 (no.46, 2021), 67-69면.


8) Ronald Dworkin, “A New Map of Censorship,” Index on Censorship (May 1, 1994), p.14; “Foreword,” in Ivan Hare & James Weinstein(eds.), Extreme Speech and Democracy (Oxford Univy Press, 2009), p.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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