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닭에서 카레까지, 너의 매력은 어디까지니.
요즘 말로 ‘급식이(급식을 먹는 초, 중, 고등학생을 뜻함)’ 시절, 찜닭은 내가 싫어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그마저도 고기반찬이라고 싹싹 먹긴 했지만). 뼈만 봐도 정말 작아보이는 연약한 닭의 퍽퍽한 살과, 으깨지고 눌린 감자 때문에 묵직하니 끈적해진 양념의 만남. 이미 불어 터지고 잘게 잘려 면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당면.
나름 견고했던 10년 여의 찜닭 불호 역사는 홍대의 한 찜닭집을 가면서 끝났다. (역시 고기는 작았지만) 그곳의 고기들은 씹는 맛이 좋았고 찐득한 양념 범벅을 하고 있지 않았다. 40년 전통의 할머니의 족발 간장이 이런 색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진한 색깔의 양념은 묽어 갓 만든 듯한 신선한 느낌을 줬다. 감자도 당근도 제 형태와 식감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화룡점정은 바로 당면. 당면은 둥글고 얇은 것만 있는 줄 알았던 나에게 넓은 당면은, 존재 자체로 작은 놀라움을 줬다. 그리고 그 쫀득한 식감과 양념과의 조화는 거대한 놀라움과 감동을 줬다.
대학생이 되고,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맛집 탐방을 시작했다. 상수, 홍대, 합정 맛집을 섭렵하면서 내가 고기와 면을 지독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대의 그 찜닭집엔 약 50%의 배탈 확률을 무릅쓰고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 때마다 나는 적은 고기를 부풀리듯 고기들 아래에 숨어 있는 당면을 야무지게 휘감아 흡입했다. 쌀국수 면도 좋고, 칼국수 면도 좋고, 쫄면도, 라면도 좋지만 넓은당면의 쫄깃함엔 비할 것이 없다.
직장을 옮기면서 찜닭집엔 자주 가지 못했다. 엄마와 쇼핑을 하던 날,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라면 신제품 더미들 옆쪽에서 넓은 당면을 발견했다. 나는 찜닭을 만들 줄 모르는데. 그럼 넣어 먹을 데가 없잖아. 라는 생각은 잠시, 흡사 팬의 심정으로 납작 당면을 카트에 모셨다. 집에는 찜닭도 없었고 나에겐 찜닭을 만들 열정과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카트에 후다닥 당면을 넣은 그 순간의 반가움과 기대만은 진심이었으므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어느 날 집에 놓인 카레 냄비.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어느 새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카레 당면’, ‘카레에 당면’. 호의적인 댓글을 보고 허락을 받은 듯 부리나케 당면을 삶았다. 10분 여간 충분히 끓인 당면은 통통했고 윤기가 넘쳤다. 다소 확신 없는 사랑이었지만 카레 당면의 맛은 훌륭했다. 아니, 당면의 맛이 너무나 훌륭했다. 원래 가진 찰기가 식힐 때 쓴 차가운 물을 만나 몇 배로 강화되어 있었다. 턱이 아파도 좋아, 약 1.5인분의 당면을 금세 먹어 치웠다. 확신을 얻은 후 지고지순해진 사랑으로 4일 연속 카레당면을 먹었다. 마지막 날에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고 뚝배기에 당면을 넣었는데, 따뜻한 온기를 오래 가지게 해 줄 줄 알았더니, 뚝배기 때문에 당면은 불어 쫄깃함을 잃었다. 한 입 먹는 게 고역이었다. 맛이 없어진 당면을 보며 ‘4일 연속으로 먹어서 그렇다’면서 내 사랑도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넓은 당면은 찌꺼기가 되어 5L 쓰레기 봉투 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소중한 음식을) 판단하지 마라’,
‘지독한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지나친 따뜻함은 차가움만 못한 것을’
글을 마무리하며 나도 모르게 상투적 교훈을 글에 끼워 맞춘다. 근데 위의 결론들을 내기엔 나의 사랑이 아직 진행중이다. 찜닭집에서 불기(불어터짐의 진행 정도-단어 창작) 2기의 넓은 당면이 나와도 난 여전히 당면이 좋다. 아직 남아 있는 약 1.5인분의 당면을 익힐 때는 냄비에 팔팔 끓여 차갑게 식혀 그릇에 넣어 먹을 것이다. 최근 사랑에 빠진 마라탕도 사실, 더 넓고 탱글한 중국 당면때문에 두 배로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세상에 당면같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 사람은 지독하게 맛깔나는, 어디에 있어도 누구나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려나. 나는 그의 지독한 매력에 빠져,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수 있는 지고지순한 사람으로 둔갑해 있겠지. 그나저나 당면에 대한 나의 사랑의 형태야말로 순수하고 끝없는 사랑이 아닐까. 1절만 해도 될 실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제 마라탕을 먹었는데 글을 쓰니 또 마라탕이, 당면이 또 먹고 싶다. 이렇게 먹어도 고프고, 실망해도 다시 기대하는 관계라니! (3절을 넘어 4절까지 가기 전에) 결론은, 나는 당면이, 당면같은 사람이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