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만 4세가 되자마자 근무하던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입학시키고 데리고 다녔었다. 집 가까운 곳 유치원에 맡기고 싶었지만 아이의 등 하원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 편도 1시간 남짓, 매일 2시간, 어린아이를 차에 태워 함께 했던 출퇴근 시간들.
출근 시간엔 아이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엄마가 재촉하니 비몽사몽간에 따라나서느라 차 안에서 나머지 잠을 자며 갔다. 그런데 퇴근길에는 하루 종일 유치원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도 남았던지, 오는 내내 내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성화를 부렸었다.
종일 말했으니 이제는 좀 입을 닫고 싶은 퇴근길이었지만, 아이가 졸라대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었었다. "옛날, 옛날, 빵꾸똥꾸라는 애가 살았는데"로 시작하는,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이야기들. 그럼 딸아이는 '빵꾸똥꾸'라는 우스운 발음이 재밌었던지 이야기 시작부터 까르르 웃어대곤 했다.
동화 이야기를 섞어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생각이 안 나면 엄마의 학교 일과를 그 인물로 치환시켜 들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한 마디도 하기 싫을 정도로 피곤한 날엔 오늘은 네가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라, 고 했다. 그러면 딸은 그 또래 아이가 지어낼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들려주었었다.
그렇게 2년을 했으니,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때 아이가 지어냈던 주옥같던 문장들을 남겨두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참 아쉽다. 정말 소중한 것은 지나 봐야 알게 되는 법.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다시 보며 아이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살아가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며 엄마로서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무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본다.
사춘기 시절에 나의 엄마가 하셨던 말씀들 중, 어린 시절의 나에게 했던 말과 다른 모순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 지금 그 시기를 겪고 있는 내 아이가 똑같은 감정을 겪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당시 엄마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 엄마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삶은 흑과 백, 둘로 나눌 수 없는 복잡한 것, 을 알게 되면서 아이가 삶에 휘둘릴 때 단단히 지탱해 줄 엄마의 말은 무엇인지 더 고심하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 엄마가 하셨던 것처럼.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워낙 유명한 영화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본 사람들도 많을 테니, 줄거리는 생략하련다. 만일 한 번도 안 보신 분이시라면, 오늘 당장 보시길 강력히 권하고 싶은 마음을 대신하며.
영화 속 대사들은 대부분 IQ 75인 포레스트 검프의 입으로 전달되므로 어려운 말이 없다. 대부분 누구나 쉽게 듣고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대사들이다. 그런데 그 쉬운 대사들 속에 삶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으니, 이 영화가 두고두고 명화로 남을 이유다.
포레스트 검프가 들려준 영화 속 대사를 내 삶과 연결시켜 보는 것. 2021년 새해 첫날, 의미 있는 출발이 되지 않을까 여기며 상기해 본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아무도 어떤 걸 가질지는 알 수 없단다. 신께서 네게 주신 걸로 최선을 다해 살거라.
포레스트 검프의 엄마가 그에게 들려주신 말이자,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말이다. 초콜릿 상자 안에 든 초콜릿을 선택할 수 없듯, 세상에 나올 때 나에게 주어진 삶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으며, 되돌릴 수는 더더욱 없는 것. 그래도 신은 누구에게나 달란트를 주셨으니 우리는 내게 주신 그것을 키워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발휘해 기적적인 삶을 살아낸 것처럼.
난 가고 싶은 곳에 가기 위해 뛰었는데, 그게 삶의 기회가 될 줄은 몰랐어요.
자신을 놀리던 친구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곳을 향하여 달렸다. 달리다 보니 누구보다 빠른 발을 가졌다는 재능을 발견하게 된 포레스트 검프. 그는 이 재능으로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육군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참전하게 된 베트남전에서 만난 댄 중사와 친구 버바와의 인연으로 새우잡이 배의 선장이 되어, 검프 새우 회사까지 세우게 된다. 이는 당시 신생 기업이었던 애플사에 대한 투자로 이어져 이후 검프는 일하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이 말은 끊임없는 목표 지향과 주변인들과의 비교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삶의 기회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 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저마다 운명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바람 따라 떠도는 건지 모르겠어. 내 생각엔 둘 다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아.
검프가 사랑했던 여인, 제니의 묘지 앞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했던 이 말은 가장 먹먹했던 말이다.
중년이 되어보니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었던 것도 같고,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또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먼 길 돌아 결국 벌써 전에 갔어야 할 자리에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운명이 있는 것 같다가도, 그렇게 떠돌지 않았더라면 다시 돌아온 그 자리의 소중함을 몰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 내다 보면, 삶의 역사가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닿았던 대사 세 가지만 추려냈지만, 실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든 대사들이 다 반짝이는 보석 같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 친구들과의 약속을 일평생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포레스트 검프의 삶은,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고 과도한 경쟁 속에 영혼을 갉아먹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과거를 뒤로 남겨 두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는 포레스트 검프 엄마의 대사를 마지막 말로 대신하련다. 아쉬운 지난 일, 부끄러운 나의 과거, 나를 괴롭혔던 모든 지난 기억들은 뒤로 남겨 두고 새해, 새 날을 향해 묵묵히 나아갈 수 있도록 내게 주어진 엔진을 잘 예열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