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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07. 2021

믹서기를 갈며 다른 나를 보다

나는 몇 가지 사항으로 규정되지 않을지니


무엇을 먹어야 하나.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에 메뉴를 풍성하게 달리 할 재주는 없다. 뭔가 간편하면서도 든든한 것. 그런 것이면 좋겠다. 이틀 전에 오븐에 구워 놓은, 온기를 잃고 늦가을 낙엽처럼 바삭바삭 건조해진 겉껍질을 드러내며 방치되어 있는, 군고구마가 눈에 들어왔다. 오븐에서 갓 꺼낸 고구마는 반으로 갈라놓으면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달디 단 노란 속살로 군침을 돌게 했는데, 식어 버린 고구마는 마음 돌아선 옛 연인의 손 마냥 잡을까 말까 싶다.

오늘은 내 저것들을 몽땅 처분해 주리라.

  

믹서기를 꺼내어 믹서기 용기에 바짝 마른 고구마 껍질을 까고 아직은 말랑말랑한 속살을 넣는다. 냉장고 용기에 담긴 채 며칠 지난, 마찬가지로 손이 잘 안 가지는 갈변된 사과도. 아이들이 싫어하는 당근도 잘 씻어 껍질째 조각조각. 바나나가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없으니 이 정도만 넣자. 군고구마가 단 맛을 대체해 줄 테니 꿀은 평소보다 적게. 우유를 넣고 믹서기를 돌린다. 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소용돌이에 덩어리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춰간다. 식어버린 군고구마와 갈변된 사과, 인기 없는 당근이 한데 섞여 모조리 갈린다. 작은 알갱이 하나 남김없이.


작은 조각도 허용치 않으리라,

열심히 믹서기를 돌리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평소의 나와 얼마나 다른가 하고.

난 음식이 섞이는 맛을 유난히 싫어한다. 그래서 비빔밥이나 볶음밥을 별로 안 좋아한다. 개별 재료로서 낼 수 없는 각종 야채나 고기류가 한데 섞여 만들어내는 제2, 제3의 맛이 있을 텐데,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는 사고를 만들어내어, 섞인 맛을 싫어한다는 말을 입에 올린 후, 나의 뇌는 나를 '섞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규정해 버린다. 그래서 또 입버릇처럼 비빔밥이 싫다고 말한다. 스스로 '섞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규정해 버림으로써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거나 맛 볼 기회마저 차단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몇몇 사항으로 규정하기에는 내 안에 참 많은 내가 살고 있음을 본다.

20대 때 이상형이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나 꿈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라는 사람과 만나 살고 있다. 거의 30년 이상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한때는 저녁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사람들은 다들 별 생산성도 없는 일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른 아침의 상서로운 기운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을 놓치며 사는지 알기나 할까, 생각하며.

저녁과 밤 시간대의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은 저녁형 인간인 남편과 만나 15년 이상을 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지금은 이른 아침에 뭔가 영감이 떠올라 글을 쓰는 내가 상상이 안된다. 생각과 문장이 정리되는 시간대는 고즈넉한 저녁 시간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올해 초, 면대면 만남이 없는 화상 수업 따위로 어떻게 아이들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공개수업 같은 보여주기 식 수업의 일환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길어지는 코로나로 인해 매일 아이들과 화상으로 만나다 보니, 이 공간에서도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어제는 1년을 마치며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마음을 전하는 쪽지 나누기 수업을 했는데, 많은 아이들이 내게 전해주는 마음은 감동이었다. 다음 주 종업식 전에 나도 아이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써봐야겠다는 마음이 들만큼.

고심할 일은 면대면이건, 화상이건, 만남의 '수단'이 아니라 어찌 되었건 만난다는 '사실'과 '목적'이었나 보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기질과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른 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설레고 가슴 뛰는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나곤 했다.

고등학교 때 뻔질나게 땡땡이치던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 우리가 전교 몇 등 안에 드는 공붓벌레도 아닌데, 야자(야간 자율학습) 좀 몰래 빠지자고 친구랑 둘이 계획하고는, 끝내 용기를 못내 나오지 못했던 친구를 밖에서 기다리며 읽었던 소설책이 그랬고, 딸과 둘이 떠난 10일간의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구글맵을 잘 못 읽어 서로를 탓하며 헤매다 작은 골목길에서 만났던 피렌체의 예쁜 소품 가게들이 그랬으며, 1, 2학년 아이들의 악기로만 알았던 오카리나가 표현하는 삶의 희로애락의 연주가 그랬다.


'섞는 맛을 싫어하는', '명확한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여러 해 살았다. 그게 온전한 나의 삶은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예전의 나와 달라진, 또 달라질 나를 발견하는 재미를 찾아보련다.




손 안 가는 음식들 다 넣어 갈아 만든 아침 음료 맛은 어땠을까? 궁금하시면 직접 해 드셔 보시라. 내가 느끼는 맛과 여러분이 느끼는 맛은 또 다를 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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