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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28. 2021

아들의 얼굴을 연필로 그리며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시간


아들 녀석이 자꾸 내가 있는 방에 들락거린다. 엄마가 뭔가에 집중해 있는 것을 보고는 괜히 한 번 훑어보더니 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이 녀석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군.


"왜 그러는데?"

어제 학원 수업 시간 때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나 보다. 아들은 온라인 숙제장에 올라오진 않았지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숙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온라인에 올라오지 않아서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이 많았나 보다. 어쩔 수 없이 학원 선생님이 어제 내주셨어야 할 숙제를 오늘 내주시는 바람에, 아들은 숙제를 미리 해버린 결과가 되어 버린 거다. 중학 과정을 진행 중이라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수업 중에 내준 숙제를 잊지 않고 했다니, 기특하다.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못 듣고, 들었어도 덤벙덤벙 들어서 정확한 정보 전달을 안 해 주어 얼마나 나를 답답하게 했던 아이 었는데. 이제 중학교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녀석, 마음가짐이 달라지나 보다.

"우리 아들이 학원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나 보네. 선생님 말씀도 안 잊고 숙제도 챙겨하고. 잘했네!"

자꾸 들락거린 데는 그런 이유가 있던 거였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엄마로부터 칭찬받으려는.


온라인 졸업과 함께 이제는 진짜 초등학교에 '안녕'을 고했으니, 아들은 이제 초등학생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직 중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이다. 아니, 어제 치수에 맞는 중학교 교복을 찾아왔으니 이제 중학생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겠지.


4 지망 희망교에 배정되고 서운해하던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그 뒤로도 가끔 1 지망 학교를 언급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배정학교 교복을 입어보니 자기 학교라는 소속감이 조금은 생긴 걸까?

아들은 집에 가져온 교복을, 입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입고 나와 보여주었다.

"이야! 아들, 멋지다! 이제 진짜 중학생 같네!"

엄마, 아빠의 환호에 기분이 들썩였는지 교복을 입은 채로 BTS 댄스를 한바탕 췄다. 녀석, 이제 00 학교 학생 다 됐네.

 



아들 녀석이 학원 숙제 미리 한 것에 대해 엄마의 말 칭찬이 부족했던지, 엉덩이를 토닥여 달라고 한다. 이런 어린 아기 같은 아이가 교복 입고 학교에 가면 진지한 척, 멋진 척은 다하겠지. 인심 쓴 김에 통 크게 써 봐야겠다.

"아들, 너 엄마랑 뭐 하고 싶은 놀이 있어?"

아들 표정이 환해지며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더 가늘어지고 입은 헤벌쭉 벌어진다.


요즘 좋아하는 축구 교실도 못 가고, 방학이면 항상 가던 외할머니, 할머니 댁에도 코로나로 못 가게 되어 아쉬워하던 녀석이다. 학원 숙제를 미리 해서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을 엄마와 보내고 싶어 하는 녀석의 마음이 언제고 계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원할 때 함께 해 줘야지.

"그럼, 엄마! 서로 얼굴 그려주기 하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 하잔다. 그러더니 재빨리 이면지랑 연필을 식탁 위에 준비한다.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듯.

 

아들이 공들여 그리는 스타일을 아는 나는, 시간이 많이 걸릴까 봐 어떻게 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수 있을까, 꾀를 낸다.

"우리 10분 내로 그리기 하자. 캐리커처 그리기로."

녀석이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격에 멈칫, 하다가 오케이 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녀석이 아기 때부터 하는 캐릭터나 물건을 가져와 날이면 날마다 그려달라고 했었다. 매일 그려주다 보니, 없던 그림 실력도 늘 지경이었다.


소근육이 발달하기 전에는 나더러 그려달라고 했다가 뭔가 원본과 다른 점을 발견하면 다시, 또다시 그리게 해서 어떤 날은 몇 십장씩 같은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힘들어진 내가 이제 좀 그만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 그때서야 그려진 그림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것을 챙겨가던 아이였다.

소근육 발달이 왕성해져 아이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 매일 그려주기에서 놓여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속으로 기뻤던지.


아이가 큰 후로 뭔가를 함께 그려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원래도 썩 잘 그리지 못했던 그림이지만, 오랜만에 그리려니 더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것에서 빨리 놓여나기 위해 10분 캐리커처 그리기로 제안했으니 10분 간의 엄마의 진심을 보여 줘야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양'보다 '질'이랬으니까.

 

아들이 먼저 연필로 내 얼굴의 중심을 잡기 시작한다. 난 일단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녀석 볼이 터지겠다. 이제 그만 살찌고 키 좀 쑥 커야 할 텐데. 눈썹도 안 보이게 앞머리를 꼭 저렇게 길러야 하나?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그것들을 지그시 누르고, 얼굴형을 먼저 그린다. 그런 다음 눈과 코로 대강 중심을 잡고 입을 대충 먼저 완성한다. 코가 생각보다 비슷하게 안 그려져서 애를 먹었다. 코를 그리는 건 매번 어렵다.


눈이 제일 생명인데, 녀석도 나를 바라보며 그리고 있으니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는 통에 순간 이미지 찍기가 어렵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그리려고 하니 선 하나, 점 하나 안 보고는 그려지지 않는다니.

"엄마 좀 잠깐 쳐다봐봐. 눈을 잘 못 그리겠잖아."

그러니 녀석이 눈에 힘을 주고 멈춤 자세로 바라본다.

억지로 짓는 표정은 명함 사진처럼 자연스럽지 않다. 녀석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 된다. 결국 그 모습을 따라 그리니 원래 눈보다 크고 정감 없이 차갑게 그려졌다. 녀석은 웃는 상이라 평소엔 주로 초승달 눈이어서 그림보다 눈이 더 작다.


아들 얼굴 연필그림. 원래는 더 귀여운 상인데 내 부족한 실력이 담지 못한다ㅠ
(왼) 6살 때 아들, (오) 7살 때 딸, 5살 때 아들


생각해보니 아이들 어릴 때는 앉혀놓고 연필로 그 모습을 담고자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좀 더 자주 남겨둘 걸 그랬나. 사진 하고는 느낌이 다른, 내가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 코, 입.


아까부터 엄마를 그린 자기 그림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엄마랑 너무 안 닮았다고 녀석은 설레발이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덧칠로 그림을 위장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연필그림이 점점 시커멓게 덮여 간다.


결국 아들은 평소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사진도 못 찍게 했다. 괜히 10분이라고 해서 녀석 마음을 서두르게 했나 보다. 아빠가 지나가다가 잔뜩 연필 선이 덧칠된 아들의 그림을 보고는 엄마랑 똑같이 생겼네, 해서 찌릿! 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았다.


다음에 그리자고 할 땐 시간을 정하지 말아야겠다.

다른 할 일 생각에 아들과 놀이 시간을 후딱 끝내려고만 했지, 아들이 정성스럽게 그려 준 제대로 된 나의 얼굴을 받아보지 못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우리가 10분 이상 유심히, 정성 들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니 그걸로 만족하련다. 다음엔 나도 녀석의 귀여움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시간과 공을 들여 그려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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