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여자) 사람'의 탄생

제2의 꿈입니다

by 정혜영


이뤄지지 않았기에 꿈인 거라고, 이룬 꿈은 꿈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던가.

내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다. 의사 집안에서 의사 나고 법관 집안에서 판검사 난다 했는데, 교육자 없는 집안에서 교사가 되었으니 나름 꿈을 이루었다.

사람은 평생 마음에 품은 꿈 하나를 인생의 나침반 삼아 살아내는 거라고, 힘을 얻어 살아가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던 젊은 날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작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현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닌 '생활'이 된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설레는 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내 사람인 그(그녀)를 보며 매일 심장이 쿵쾅된다면 설레는 게 아니라 심장병이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그렇게 나의 일상 속에 녹아들게 되면 한때는 좌절 속에서도 나를 일으켜 세우던 꿈은 일상의 공기처럼 그 소중함이 바랜다.


인간의 뇌라는 것은 일상의 평온함, 항상성 속에서는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약간의 불안, 긴장, 두려움의 감정으로 평상심을 잃게 될 때 우리의 뇌는 더 활발히 작동한다. 내 몸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려놓으려고 말이다.


지금은 좀 변했지만, 젊은 날의 나는 이 긴장감을 오히려 즐겼던 것 같다. 끝내야 할 일이 있을 때 서둘러하려 들지 않고 급하지 않은 일을 붙들고 있곤 했다. 언제까지 해내야 하는 일은 대개 재미없는 '일'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붙들었던 것들은 대개 평소 하고 싶었으나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 미뤘던 것들이다. 독서나 영화 감상, 친구와의 오랜 수다 같은.


그렇게 해야 할 일을 계속 뒤로 미루다 마감 이틀 전부터 손대기 시작하면 잡생각이 들 틈이 없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해결해야 할 일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나의 뇌는 오직 해야 할 일을 다루는 것에만 활성화된다. 해야만 하는 일을 끝마치는데 총력을 다하기 때문에 오히려 최대치 기능을 발휘한다. 일을 계속 미루다 마감 직전 총력을 다해 끝냈을 때의 짜릿함은 행복 호르몬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약물 효과쯤 되지 않을까. 그 짜릿함을 한번 맛보면 그다음도 그와 같은 패턴으로 일 처리를 하게 된다.

내 반 일을 혼자 처리하는 일을 하는 교사라 망정이지, 일반 회사에서 미리미리 일을 끝내는 사람과 콜라보라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경우라면 기피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구조조정 대상 1호였을래나?


지난 주말까지 모처럼 나의 뇌는 새로운 일을 처리하느라 급격히 활성화되었다. 내 글을 다듬는 작업 때문이었다. 이곳 브런치에서 20년 차 교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대한민국에서 '교육'이라는 영역을 담당하는 일원으로서의 일상과 고민, 새로운 배움에 대해 글을 써 왔다. 그 글들을 모은 내 책이 곧 나올 예정이다.


현직 소설가이기도 하신 출판사 대표님은 책이 나오면 일주일은 엄청 행복했다가 2주일째 되면 엄청 부끄러워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난 나의 글을 수정 보는 과정에서 이미 너무 부끄러워졌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내어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가. 도로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그냥 주워 담고 싶어 졌다.

브런치에 발간하고 모 신문에 생활글을 게재하면서 여러 차례 봤던 글들이었지만 다시 보니 수정할 것 투성이었다. 2차 수정본에서도 붉은 볼펜과 포스트잇으로 점철된 나의 원고를 보고 있자니 정말 부끄러움 한가득이었다.


이미 마지막 최종본이 넘어갔으니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책이 나온다는 것은 설레는 일로 시작했다가 스트레스 가득한 일이 되었다.

욕심이 앞지르면 목적이 흐려진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나를 좀 더 들여다보며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인 나를 다듬어가는 것이다. 내 책이 나의 미완을 도드라져 보여줄까 봐 걱정 한가득이지만, 내 손을 떠난 일이니 이제 순리에 맡겨야겠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마스터 X'에서 '최초', '1호'로 기록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을 다루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던 중이라 더 관심 있게 보았다. 

여성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자유롭지 않던 시대에 직접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문제를 제기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모색했던 나혜석의 삶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따르기도 벅찬 그녀의 삶에서 내가 따를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며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일. 100년도 더 된 시대에 미리 산 인생 대선배께서 '너도 글을 쓰며 살아. 그게 너를 바로 보는 길이야.' 하신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책을 내어 놓으련다(정작 나오면 쥐구멍에 숨고 싶어 질지도...).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느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라 찾으라 하리!
- <경희>, 나혜석, 1918.


20대 초반의 나혜석이 쓴 자전적 소설, <경희>에서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갈구했다.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 인간이라고 역설한다.

먹어본 사람이 더 맛있는 것을 찾고, 돌아다녀본 사람이 더 여행에 목말라하는 법이다. 써 본 사람이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책을 내어 본 사람이 더 좋은 책을 내어 볼 생각도 들 것이다.


부끄럽지만 설레기도 하니, 다시 제2의 꿈을 꾸어 본다. '글 쓰는 (여자) 사람'으로 탄생해 보는 건 어떠냐고 내 안의 내게 물어본다. 자격미달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래도 다시 물어본다. 된다고 할 때까지 물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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