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방 메시지, 숫자 '1'의 의미

by 정혜영


늦은 저녁 11시 17분.

건넌방에서 남편의 통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뭔가를 좀 써야겠다고 내 작업대인 화장대 앞에 앉아 노트북에 집중하던 터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있는 나.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경우 없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람.

거의 닫혀 있던 문을 꾹 눌러 닫았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핸드폰을 들고 들어와 건넨다.


"장모님이셔."


생각을 모으고 말을 고르던 순간에 관심을 딴 데로 돌려야 하는 상황은 언제건 반갑지 않다. 그런 마음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긴 모양이었다.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 없는데?"


친정 엄마의 무슨 일 없는데? 는 기분이 언짢아지실 때 하는 말씀이라는 거, 오랜 세월 함께 해 본 가족이라 알 수 있는 거겠지. 이 전화가 내가 건 전화가 아니라 엄마가 거신 거라는 걸 생각했다면 이유부터 물어서는 안 되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일주일 내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처럼 모이는 너희 가족 시간을 깨기 싫으시다고, 궁금해도 전화 안 하신다고 친정 엄마는 가끔 말씀하셨었다. 그 말에 가족끼리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 거냐고, 궁금하면 언제든 먼저 하라고 말하던 사람이 누군데.


엄마는 친정 식구들 단톡 방에 올려진 대화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읽음 표시 숫자, '1'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전에도 하루 종일 바빴던 날, 막내 동생이 단톡방에 올린 조카들 사진을 보고 댓글 좀 달으라는 엄마의 톡에 괜히 심통을 냈었던 적이 있었다.

유치원 다니는 남매를 키우는 막내 동생은 그 시기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모답게 매일 어제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어린 자식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도 아이들 어렸을 적에는 얼마나 핸드폰 사진을 찍어댔었던가. 그 시기에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들의 천진함, 귀여움, 순수함, 서투름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사진으로 담아내는 일이 엄마의 의무인 것만 같았던 젊은 엄마 시절의 나. 그렇게 막내는 젊은 아빠 시기를 힘들다면서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손주들 사진이 홀로 지내시는 외할머니에게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사진들이겠으나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두 딸들에게까지 같은 정도의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사진에 매번 감흥을 표하기는 아무래도 무리다. 보고도 다른 일 먼저 손대느라 잊어버리기는 다반사. 가끔 어릴 적 내 딸,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에 동하는 정도다. 어떻게 매번 넘치는 관심과 호기심이 일겠는가. 카톡 단톡방의 성격상, 비슷한 류의 사진에는 누가 먼저 댓글 달아주면 그 마음이 내 마음이려니, 손 안 대고 코 풀었다 생각하는 식인 것을.


엄마는 그게 좀 서운하셨나 보았다. 댓글 좀 달으라는 엄마의 톡에,

"댓글은 달고 싶은 사람이, 달고 싶을 때 달도록 합시다."

라고 달았으니, 돌이켜보면 차라리 무반응이 더 나았다. 매번 말은 안 했을 때보다는 했을 때 후회가 많은 법.

당연히 서운하셨을 친정 엄마께서는, "바쁘면 이모티콘 하나라도 해 주면 좋지 않겠냐"라고 마무리 톡을 다셨다. 톡 화면에 엄마의 댓글과 함께 서운해진 엄마의 표정까지 보였다.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일 때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고 멀찍이 떼어 놓기 때문에 엄마의 전화를 알지 못했다. 엄마는 동생이 올린 톡에서 엄마와 나눈 대화에 남아있는 읽음 표시 '1'이 이제나 저제나 지워지기를 보고 또 보며 확인하셨을 거다. 가족 모두가 대화를 확인하고 있음을 그녀 자식들의 '안녕'으로 삼으셨을 거다. 그러다 가끔 '안녕'을 표하는 인색해지는 자식들에게 엄마는 걱정을 얹으시는 거다.


그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매번 확인하다 한 번쯤, 안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핸드폰을 매번 눈에 붙이고 사는 것도 아닌데. 메시지를 읽지 않은 이가 내가 아니라 여동생인 모양이지만, 여동생의 생활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이제는 정말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는 말자." 수확 후 여기저기 흩어진 낱알 같은 나를 좀 추슬러 보겠다고 마음에 새겼던 이 문장이 가족 앞에서는 마구 흔들리는 게 불편한 거다. 별거 아닌 일에 또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발동 중인 것 같아 미안해지고, 미안해지는 마음이 드는 이 상황이 싫어져 쓸데없이 뾰족한 말이 되어 나오는 이 상태가.


"뭐 좀 끄적이느라 전화 온 줄 몰랐어."

"아이고, 몸 축나니 그런 거 하지 마라. 가족들이랑 같이 TV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쉬어."

"엄마, 나 이게 쉬는 거거든."

"그거 하려면 신경 써야 하는데 그게 뭐가 쉬는 거냐?"


서운해진 엄마도 생각을 굽히지 않으신다. 자식에 대한 걱정은 평소엔 자제하시는 자식 설득에 힘을 실어주나 보았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뭘 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그 흔한 "공부하라"는 말도. 여자 홀로 세 자식을 키워내시기에 분명 녹록지 않은 삶이었으므로 엄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겠다는 말보다는 안 하겠다는 말이 더 안심이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려면 대체로 ''이 들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정말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일의 결과를 오롯이 책임져야 했다. 자기가 한 일 자기가 책임지는 일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는 결과에 대해 미리 재고,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좀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까. 돌아보니 한 일보다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아 아쉬운 마음에 누구에게라도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어 진다.

이건가 보다.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에 뾰족해지는 마음의 정체는.


얼마 전 우리 반에서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공예 수업을 진행했다. 목재를 이용해 가족이 함께 하는 활동을 표현하는 목공예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보니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 아이들에게 일주일만 전시를 하고 가져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열과 성을 다해 만든 작품이라 가족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집에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그냥 가져갔으면 싶은 작품을 만든 아이 둘이 전시해 달라고 내 책상에 갖다 두는 것이었다. 전시하고 싶다고 해 놓고 '그냥 가져가도 괜찮아' 할 수도 없어서 게시판에 전시했다. 솔직히 그 아이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다른 멋진 작품과 비교해서 자신의 것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그건 '자존'의 문제다.


다른 브런치 작가들의 훌륭한 글을 읽고 나면, 며칠 글 쓸 마음이 안 난다. 넘어설 수 없는 엄청난 필력을 마주하면 넘어서고 싶다는 패기보다는 초라한 나의 글과 함께 일순 쪼그라든다.

그러기를 며칠, 다행히 능력과는 별개로 하고 싶은 일은 떠나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다 나를 끄적거리게 하니, 이 순간에 고맙다. 쓰다 보면 또 쪼그라드는 나를 매번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지만.


나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격려받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설명하려다 혹시 엄마의 예민한 마음을 건드리게 될까 걱정이다. 그래도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오래 산 가족이어도 알아서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기는 어렵다. 내 안애 생겨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 내는 것. 그것이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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