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아버지'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제 지간
초등학교 5학년 때 방과 후 친구의 보충 공부를 도와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던가. 친구가 어려워하던 것을 가르쳐 주면서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사람'이었던 '선생님' 역할을 흉내 내는 것이 좋았다. 난처한 이에게 도움을 준다는 기쁨은 뿌듯한 자긍심이었다. 막연하게 가르치는 일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막연히 키워왔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꿈을 구체화시킬 '동기'를 만났다. 중1 때 '국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당시 30대 중반으로 가르치는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다. 별로 키도 크지 않고 얼굴도 평범하셨던(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멋진 연예인을 흠모할 시기였던 사춘기 10대 초반, 나의 '우상'이었다.
국어 선생님이시다 보니 기본적으로 말씀을 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려지는 것은 그분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수업 모습'과 학생들을 대하시던 '태도'이다.
침착하신 어투로 교과서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쏙쏙 뽑아 하나라도 더 우리들에게 집어넣어주고 싶어 하시던 '열정'. 맨 앞좌석은 그분의 아밀라아제 비를 피해야 할 판이었다.
매시간 그분의 수업은 잔잔한 물살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아가다 거대한 파도를 타고 넘는 서핑처럼 드라마틱했다. 크게 몸짓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국어'라는 잠이 오는(?) 교과를 그렇게 감동적으로 끌어갈 수 있으셨을까. 30대의 젊음에서 기인했던 것이었을까. 교과 전공자로서의 자신감이나 직업에 대한 애정이었을까.
그랬다면 다른 비슷한 연령대의 선생님들께도 같은 마음이었어야 했을 텐데 난 유독 그 선생님이 좋았다. 내가 국어 교과를 가장 좋아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선생님이 된다면 그분처럼 매시간 열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가르치고 싶다는 선망이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심부름이라도 하나 더 해보고 싶어 난 국어 부장을 자청했다. 교과 부장은 아무래도 담당 교과 선생님과 눈도장 찍을 일이 하나라도 더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렇게 중학교 1, 2학년 동안 국어 부장을 하면서 나는 선생님이 되리라는 막연한 꿈에서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다짐으로 나아갔다. 꿈이 확실해지자 점심 먹은 후 식곤증으로 꾸벅꾸벅 졸기 마련이었던 5교시 국어 시간조차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었다. 교과 관련 지식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암기시킬 때 사용하셨던 암기법이나 강조할 때 사용하셨던 엑센트까지.
그분이 나의 중3 담임 선생님이 되신 것은 '운명'이었다. 그해가 나의 중학교 3년 동안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해였다. 선생님께서도 없는 형편에 나름 열심히 하는 나를 갸륵히 보셨던 것 같다. 문제집 살 돈이 부족할까 봐 출판사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문제집을 모아 주셨고, 추천해 주신 덕분에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로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던 엄마가 학교 일에 신경을 많이 못 쓰셨지만, 선생님 덕분에 학교에서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다.
연합고사를 앞두었던 중3 하반기 어느 날, 멀리서부터 서서히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던 무렵,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했던 나의 중학교 건물 앞 벤치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라고 생각해라."
시험 기간 보충 수업을 받으며 개별 상담이라도 하셨던 것이었을까.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교직에 들어와 많은 제자들과 만났다 헤어지다 보니 내가 한 말을 다 기억할 수 없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아마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난 선생님을 '마음의 아버지'로 여기며 살아왔다.
경제적인 형편으로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원하셨던 엄마를 설득해 주셨던 이도 선생님이셨고, 대학에 진학한 내게 4년 내내 과외 학생을 소개해 주셔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력해 주신 분도 선생님이셨다. 졸업 후 취업과 연애 고민 상담까지 해 주셨으니 선생님은 내게 아버지 그 이상인 존재 임에 틀림없다.
결혼 전 언젠가 지금의 남편과의 사이를 반대하시던 엄마 때문에 선생님께 찾아가 고민 상담을 했을 때, 선생님께서 방법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매번 내게 바른 해법을 주시는 분이셨기에 귀가 쫑긋했다.
"아이를 먼저 갖거라."
순간 선생님 앞에서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항상 바르고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하셨던 선생님께서 '혼전 임신'을 방법으로 제시하시다니. 그것도 엄청 진지하신 표정으로 말이다.
당시 'X세대'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장착한 신세대였던 내게 혼전 임신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구시대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평생 바른 길만을 걸어오셨을 것 같았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놀랍기는 했다. 당시엔 선생님께서 진정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구나, 싶었다. 그때 선생님이 나를 꼬맹이 중학생 제자가 아니라 어엿한 성인으로 대하셨음을 이제야 안다.
교사가 되어 수도권으로 전근 온 뒤로 선생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매년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찾아뵙곤 했었는데.
엊그제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께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콘 선물을 보내며 일 년 만에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하면, "오냐~ 00아~"하신다. 언제 들어도 반갑고 뭉클한 선생님의 목소리. 선생님의 건강을 여쭙고 나의 근황을 전해 드렸다.
선생님은 작년 2월에 정년 퇴임을 하셨다. 선생님의 정년 퇴임에 맞춰 중3 때 동창들이 함께 모여 선생님의 퇴임을 축하하는 자리를 갖고자 계획 중이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한 달, 두 달 미루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언제나 얼굴 볼까나?"
"선생님, 2년 후에 봬면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너무 늙어서 깜짝 놀라실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허허허, 웃으셨다.
한 해, 한 해가 다르다더니, 이제 한 달, 한 달이 다르다고 느껴진다. 선생님께서는 그새 얼마나 연로해지셨을까. '교사'가 퇴직 후 급격한 건강 저하를 맞는 직업군이라고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린 제자들이 자주 찾아뵈어야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실 텐데.
이제 그때의 중학생은 퇴임을 맞으신 은사님과 함께 늙어가는 중년이 되었다. 이 나이가 되어 만난 생의 고민에 대해 어서 빨리 은사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싶다.
아버지로 여기라 하시던 든든한 말씀이어도 좋고, 아이를 먼저 가지라 하시던 파격적인 발상이라도 좋겠다.
선생님 앞에 앉아 그때의 어린 중학생으로 돌아가 잠시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다. 온갖 비교와 욕심, 마음의 번잡스러움을 잠시 내려놓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