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냐, 수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선택 앞에서 결정을 고민하는 순간들

by 정혜영


"참외 이제 없어?"


딸아이가 참외를 찾았다. 10개 남짓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그 참외들 절반 이상이 누구 입으로 들어갔는지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과일을 좋아하는 딸은 다이어트 중이라며 밥은 새 모이만큼 먹으면서도 과일은 줄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줄어든 곡기의 양을 대신해 과일로 채우는 모양새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나중에 대학 가면 살은 저절로 빠지게 되어 있다 하면 목표를 세워 열심히 실천 중인데 힘 빼는 말 좀 하지 말라는 퉁박이 돌아온다. 과일을 그렇게 먹는데 살이 빠지겠냐, 고 목구멍까지 나오려던 말을 용케 참았다. 사춘기 딸이랑 말로 실랑이해봤자 이득 볼 거 하나 없다는 손익 계산이 빠르게 나왔으므로.


손이 작은 편인 내 주먹만 하거나 좀 더 작은 크기에 모양은 제멋대로인 못난이 참외였다. 상품성으로 따지자면 한참 떨어지는 생김새였지만 집에서 식구들끼리 먹는 과일이니 모양은 아무래도 좋았다. 요즘 비가 적고 따사로운 햇볕이 여러 날이어서인지 과일들 맛이 참 달았다. 마트 매대 옆을 지날 때 풍기는 달큼한 향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면 내내 생각날 걸요?' 하듯 유혹적이었다.


"우리 직원들도 두 봉지씩 따로 자기 몫 챙겨놓는 참외랍니다."


마트 사장님의 은근한 참외 맛 피력도 구매 욕구를 재촉했다. 그렇게 사들고 온 참외 한 봉지를 삼일도 못 가 다 소진했으니 만족스러운 소비일 터였다.


퇴근길에 딸아이가 생각나 다시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이렇게 맛있는 참외가 그새 다 팔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거래처에서 계속 갖다 두는지 여전히 달큼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 봉지나 저 봉지나 못생기기로는 서로 우승을 다투는 모양새인데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나은 상품을 고르느라 봉지마다 들어 보며 안에 든 참외를 비교하던 중이었다.


"오늘 수박 대박입니다! 이번에 우리 수박 가져다 드시면 다른 집 수박 못 잡숩니다! 달디 단 수박 한 통 가져다 드셔 보세요!"


마트 사장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마트 전체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참외 옆에 진열된 소담스러운 수박에 눈에 갔다. 저 수박이 그렇게 맛있단 말이지? 순간 마음속에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참외를 살 것인가, 수박을 살 것인가. 참외만 계속 만지작 거리며 속으로는 수박을 염탐 중이던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셨는지 사장님께서 수박 안 가져가면 후회할 거라고 쐐기를 박으셨다. 아무래도 장사하시는 분들은 '관심법'에 통달한 분들인 듯하다.

그렇다고 둘 다 사기에는 들고 가는데 무겁기도 하거니와 한꺼번에 많은 과일을 사다 놓으면 그중 버려지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 둘 중 하나만 고르리라 마음먹었다.


고민이 되는 선택지를 만나면 쉬운 것을 먼저 하는 것이 진리다. 반드시 사기로 생각했었던 고기를 먼저 고르는 것으로 참외 일지, 수박 일지에 대한 결정을 유예했다. 고기를 장바구니에 넣고 돌아서는데 또 스피커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이번엔 배턴 터치를 하셨는지, 남자분이신 사장님 목소리 대신 여자분 목소리였다.


"참외가 엄청 달아요! 이 참외 꼭 짜면 꿀 나올 거예요. 달디 단 꿀참외요!"


이분들, 단체로 과일 팔 때 쓰라는 멘트 강의라도 들으시나? 상품을 소개하는 판매자의 광고는 100프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맛깔난 광고를 그냥 지나치면 실례인 거다. 더군다나 난 참외와 수박 중 무엇을 고를지 고민 중이지 않았던가.


이것으로 결정은 내려졌다. 둘 다 달디단데, 하나는 이미 아는 맛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맛이라면, 결정은 쉬워진다. 수박보다 참외의 가격이 싸니 부담 없이 참외 두 봉지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꼭 짜면 꿀이 나올 참외 두 봉지로 오늘 장보기는 이미 성공한 것이라는, 소비의 정당성까지 공고 하며.

못 생겨도 맛은 좋아~♡ ©그루잠

어떤 이들은 아는 맛을 제치고 새로운 단 맛을 기꺼이 맛보기를 선호할지도 모르겠다. 아는 맛을 선호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전에 맛본 경험은 선택의 큰 결정 요인이 된다.


과일 하나 고르는데도 주저하고 고민하는데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선택이라면 어찌 고민이 없을 것인가. 진학할 학교, 미래의 진로, 결혼/비혼의 문제, 결혼 상대, 출산의 문제, 전직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To be, or not to be'의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때마다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현명한 신의 강림이 있어주신다면야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많은 경험은 선택의 신뢰성을 높여주겠지만,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무엇이 옳은지 단언하기 어렵다. 며칠 전에 산 참외 맛만 믿고 의심 없이 샀다가 다른 판매처의 다른 맛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다행히 구입한 참외는 며칠 전 그 맛과 똑같이 참 달았다. 딸아이는 여전히 탄수화물은 안 먹겠다며 작은 참외를 씻어 선 자리에서 두 개를 뚝딱 순삭 해 버렸다.

선택의 매 순간이 오늘처럼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선택지에서 밀려난 수박의 맛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늘의 선택의 결과에 만족하련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선택의 문제에 마음이 조금 심란하지만, 단 맛을 조금 보충한다면 뻣뻣한 사고 회로도 조금은 유연해지겠지. 진짜 다른 집 수박은 못 먹게 될 맛인지 그 집 수박을 다음엔 꼭 맛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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