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회사 지인의 자살... 어제까지 알고 지낸 사람의 갑작스러운 부재와 본인 스스로 생을 끊어내어야만 했던 그 모진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어 친구는 힘든 며칠을 보냈다고 합니다. 떠나간 사람의 넋을 기리고 영면을 기원하며 훌훌 보내주어야 한다는 마음과 사랑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떠나가야 했던 절박함을 끝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혼란스러웠던 것이겠지요.
자녀가 있는 엄마이자 짧지 않은 커리어를 가진 50대의 중년 여성. 그분의 본모습을 알 수 없는 저에게는 저와 그녀와의 공통분모가 더 크게 다가왔어요. 타인의 삶을 통한 나의 삶에 대한 진단인 거죠. 끊임없는 비교우위 만이 내 삶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인가, 생각하면 서글퍼집니다. 내 삶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을 줄 수도, 행복을 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은 삶에 대한 자세를 숙연하게 만들어요.
그분과 나의 공통분모를 생각하다 '중년의 행복'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어요. 개인마다 행복의 요소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서로 신뢰할수록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2013, 국제 연합, <세계 행복 보고서>). 주변인들과 신뢰 속에 연결되어 있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또렷해지는 느낌, 이것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일 테죠. 행복도 불행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몇 년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위로 지속적으로 선정된 나라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덴마크죠.
최근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를 보며 그 나라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어요. 우리의 먹고사니즘 관련 문제와는 다른 고민을 하는 그들이 궁금했던 거죠. 과연 행복한 나라 사람들은 왜 행복한 것일까? 우리와 무엇이 다르길래 '나는 행복해'라는 감정을 더 느끼는 걸까요?
<어나더 라운드>는 덴마크인들이 행복한 이유를 알려주는 영화는 아니에요. 친구의 40번째 생일날 함께 모인 친구들 모임에서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생활 속에서 입증하고자 실천해 보는 덴마크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랍니다.
어찌 보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의욕도, 열정도 없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년의 교사들인 이 덴마크인들에게는 삶의 활력을 줄 뭔가가 필요했나 봐요.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도전 과제여서 더 용기를 낼 수 있었겠지요. 술을 못 마시는 제게 이 영화는 결국 '과유불급'이라는 네 자로 수렴되는 주제의식으로 다가왔으나 감독은 그 이상을 담고 싶어 했겠지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덴마크에서 더 행복해지기 위해 알코올의 효능에 기대 보는 이야기의 설정이 아이러니했어요. 결국 행복지수 1위라는 것은 비교우위를 점했을 뿐이지, 덴마크인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역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영화 속 주인공 마틴(매즈 미켈슨 분)과 그의 친구들에게 한 가지, 분명 행복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중년에 찾아온 뜻밖의 우울감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비슷한 연배의 '동성' 친구 말이에요. 태생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동년배의 동성 친구들 간에는 설명이 길게 필요치 않은 공감대가 형성되기 쉽죠. 오래 알아온 관계라면 공감대의 깊이는 더할 것입니다. 무모한 도전을 실천할 수 있었던 까닭의 바탕에는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관계에서 오는 신뢰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덴마크 사람들처럼>의 저자, 말레네 뤼달은 덴마크인들을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라고 소개해요. 저자는 현실주의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면서 길 위의 장애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인생의 전환기를 설렘, 희망, 기대로 부풀 날들의 연속이라고 장담할 수는없겠지요. 그러나 길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불평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젊은 날엔 세상의 모든 것을 만나는 여행을 꿈꾸었다면 중년에는 나를 돌아보는 진정한 여행을 할 때입니다. 좋은 것의 적은 가장 좋은 것이랍니다. 나보다 좋은 것과 비교하는 삶이 행복할 수는 없겠지요? 언제나 비교는 '어제의 나'와 할 일입니다.
영화와 책으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덴마크인들을 만나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제가 찾은 행복의 요소 3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신뢰할 수 있는 오랜 동성 친구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라. 남녀를 편 가르려는 의도가 아니에요. 많은 이들이 중년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감정의 탑이 통째로 흔들리는 시기를 맞습니다. 그때는 동성 친구들의 공감으로 깊은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죠. 그럴 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동성 친구들에게 잘해 주어야 하겠지요?
둘째,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을 지속하여 자기 효능감을 높이라.
행복은 신뢰 관계를 밑바탕으로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없다면 타인과의 신뢰 관계란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자기 효능감'은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이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나 기대감'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어요. 앞으로도 잘 해낼 겁니다. 이제 좀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도 돼요. 나머지는,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자고요.
셋째, 소소한 꿈을 키우며 자기의 쓸모를 찾아라.
안희연 작가의 산문집, <단어의 집>에서 '버력'이라는 낱말을 만났어요. 광석을 캘 때 광물이 섞여 있지 않아 쉬이 버려지는 잡 돌멩이를 '버력'이라고 한답니다. 반짝이는 보석 자리를 욕심내지는 않았지만 버력이 되려고 살아오지도 않았어요. 버력 같은 존재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답니다.
하버드대학 성인발달연구소에서 중년에 관해 연구한 사회학 교수(캘리포니아 홀리네임스 대학), 윌리엄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을 중요한 시기로 보았어요. 그는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라는 저서에서 이 시기를 '청소년기 1차 성장 단계와는 다른 깊이 있는 2차 성장을 통해 삶을 재편성하는 시기'로 분류했답니다.
박완서 작가는 40대가 되어서야 첫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화가 모지스 할머니는 75세에 붓을 들었지요. 꼭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고 싶은 일에 온 마음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깊이가 묻어나는 때가 중년인 걸요.
나의 쓸모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애쓰는 삶의 태도, 특히 중년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전투에 직면한다. 그렇다고 모든 전투에 응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전투, 다시 말해 인생에 무언가를 가져다 줄 전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밖의 나머지는 무심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말레네 뤼달, <덴마크 사람들처럼>
'전투'라는 용어가 다소 과격하게 느껴지나요? 어차피 삶이란 치열한 공방의 연속이니까요.
"그나저나 니들도 우울, 뭐 그런 증상 생기면 친구를 불러야 쓴다."
"갱년기 앞두고 우리도 우울 올 수 있어."
"여자들의 상처는 여자들이 치료해 줘야지."
50이 코 앞인 친구들 단톡방에 주저리주저리 이런 잔소리를 남겼어요.
모두들 자기 삶의 좋은 전투를 발견하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그 길에 좋은 친구가 함께라면 더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