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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성 프사는 '꽃대궐'

카톡 프로필마다 꽃 사진이 그득... 왜일까요?

by 정혜영


한 친구가 단톡방에 작은 꽃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꽃마리'라고 했다.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 '꽃받이'라는 꽃도 올렸다. 여러 개가 함께 피면 '꽃마리', 한 송이씩 따로 피면 '꽃받이'라고 했다. 평소 화초 가꾸기의 달인인 친구 J가 꽃을 올리는 친구 사진 밑에, "역시 늙은 소녀들이야."라고 답을 달았다. 그 말에 '늙은'에 방점이 찍혔냐는 둥, '소녀'에 방점을 찍자는 둥, 꽃 이야기는 결국 나이 듦과 연결이 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처럼 여러 꽃이 함께 피면 꽃마리, 세 번째처럼 혼자 피면 꽃받이래요 by 박일심


그러고 보니, 50 언저리 친구들 카톡 프로필에 꽃 사진이 그득하다. 작은 꽃마리류에서부터 한창 만개 중인 진분홍 철쭉, 이미 철 지난 꽃이 되어 버린 벚꽃 한 잎, 어느 친구 프로필 사진(이하 '프사')엔 연꽃도 피어있다. 여자들 프사는 젊은 날 한껏 예쁠 때 자신의 사진에서 출발해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한동안 아이들 사진으로 도배되다 결국은 꽃으로 마무리된다던데, 우리가 벌써 그때가 된 건가?


그런데 말이다... 난 아직까지 한 번도 내 카톡 프사에 꽃을 올린 적이 없다. 색색이 피어난 꽃들을 보면 너무 예쁘고, 저녁 걷기 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화려하게 피어난 라일락 꽃향기도 잠시 멈춰서 맡아도 보건만, 이 예쁜 꽃들을 찍어 내 프사에 올려야겠단 생각은 안 해 봤다는 말이다.


오래전에 함께 연수를 들었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연수에서 처음 뵌 분이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의외였다. 그분은 우연히 내 카톡 프사에 쓰인 문장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며 연락을 하게 되었노라 하셨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찾아보니, '나는 편안함 대신 용기를 선택하기 위해 어떤 취약성을 드러내고 감수했는가'라는 문장이었다. 당시 읽은 책 어딘가에서 감흥을 느껴 옮겨 놓은 문장이었을 텐데, 출처를 함께 써 놓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카톡 프사는 당시 나의 관심사와 생각을 드러내는 또 다른 내 얼굴 같아서 더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 이유로 나와 연결된 이들의 카톡 프사를 보며 그 사람의 한 부분을 미루어 짐작해 보곤 한다.


내겐 그런 의미가 있는 프사에 나와는 무관한 꽃을 올린다? 내가 가꾼 것도, 개인적으로 받은 것도 아닌데 들과 산에 피어난 꽃들을 올리는 친구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지금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결국 내 프사도 꽃으로 마무리될 것인지도.


'프사에 꽃을 올린 중년 여성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다는 난데없는 내 요청에 50 언저리 내 친구들과 지인들은 고맙게도 진솔한 의견을 보내주었다.


손가락 마디보다 작은 꽃, '꽃받이'를 프사에 올린 친구 I는,

"지천으로 널린 화려한 꽃 말고 아무도 봐주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 꽃을 우연히 발견하고 관찰하면서 인생이 참 별거 없구나. 너나 나나 똑같이 애쓰면서 사는데 나는 신세한탄이나 하는데 너는 그저 열심히 피고 지고 하는구나, 하면서 맘 다스리는 거야."


벚꽃 한 잎 프사에 올린 지인은,

"요즘은 자연을 많이 찍게 돼요. 꽃, 하늘, 나무, 풀꽃... 꽃 같은 나는 이제 저 기억너머(로 사라지고), 매년 시들어가는 나에 비해 꽃은 매년 새로우니 그들을 찍게 되네요."

라고 답했다가 한 마디 덧붙이신다.

"꽃, 자연, 그들은 내게 상처 주지 않아요. 나를 눌러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인 말, 행동,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대상. 내 마음을, 내 말을, 내 행동 등을 인위적으로 애써서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있죠)."


학창 시절부터 봐와서 이제 서로를 척 보면 아는 친구 K는, "귀염둥이 자식은 이미 컸거나 프사에 올리기 뭣하고, 쉽게 보이는데 젤 근사하고 예쁘고 보면 좋은 게 꽃이기 때문이 아니겠냐"라고 한다. 꽃이 예쁘긴 하나, 프사에 올릴 생각은 안 해봤다는 내가 연구 대상이라나 뭐래나. 친구는 내가 자기애 혹은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 꽃은 필요 없는 거란다(내 프사는 그림을 그리는 내 뒷모습이 올라있다). 음... 정말 그런 걸까? 그럼 결국은 꽃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중년 여성들의 프사는 나와는 무관한 얘기 더란 말인가.


남편으로부터 무슨 얘기만 하면 상대방 말에 먼저 공감할 생각을 않고 문제 해결부터 하려 든다는 말을 몇 번 들었던 터라 가뜩이나 내가 점점 감성이 메말라가는 게 아닌가, 살짝 고민스럽던 중이었다. 그러나 프사에 꽃을 올리지 않는다고(앞으로도 상당기간 올릴 것 같지도 않지만) 내가 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예쁜 꽃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식물인간의 감성이 아닌가.


일요일마다 오르는 북한산의 신록(新綠)은 눈이 부시다. 매주 푸르름을 더해가는 나무들 사이사이, 이름 모를 야생화와 꽃나무들이 지천이다. 처음 보는 꽃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앱에 올리면 조금 지나 '띠리링' 알림음과 함께 꽃의 이름이 뜬다. 그렇게 오늘 새로이 알게 된 꽃 이름들, '줄딸기', '귀룽나무', '야광나무', '산괴불주머니', '병꽃나무", '겹벚나무'(요건 벚나무인 건 알았지만 꽃 모양이 일반 벚나무보다 두텁다).

비슷한 듯, 다른 색과 모양으로 피워내는 꽃들에 마음이 홀린다. 번쩍이는 황금 무더기 같은 황매화와 새색시의 다홍빛 치맛자락 같은 주목 나무 꽃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지금 북한산에 핀 각종 꽃나무와 야생화 by 그루잠


과연 꽃은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제 시기가 되면 피었다 진다. 누군가는 화려한 꽃에 눈이 갈 것이고, 누군가는 구석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에 마음이 갈 것이다.

중년 여성들의 카톡 프사가 결국 꽃 사진으로 마무리된다는 말은, 정여울 작가가 <비로소 내 마음의 적정 온도를 찾다>에서 말한,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한없이 따스한 사랑과 공감의 눈길'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동요 <모두 다 꽃이야> 노래 가사는 말한다. 산에 피어도, 들에 피어도, 길가에 피어도,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봄에 피어도 여름에 피어도, 몰래 피어도 모두가 꽃이라고. 50여 년을 살아오며 화려하진 않더라도 저마다의 꽃을 피워낸 이들에게 오랜 동지 같은 대상. 그게 바로 그들의 프사에 피어난 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고보니 요즘 제 관심사는 꽃을 그리는 건가 봐요^^ by 그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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