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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l 17. 2022

우주의 기운은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가끔 기대어 봅시다


"모르는 건 어떡해요?"

열심히 수학 평가지를 풀던 우리 반 아이 하나가 묻는다. 모르겠는 것, 계속 봐도 안 풀리는 것은 그냥 건너뛰고 풀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풀라는 내 말에 아이는 비로소 안심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넘어가기 전에 못 푼 문제 번호에 별표를 쳐 두고 다 풀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그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는 세모를 치겠단다. 별을 그려둬야 눈에 띄지, 했더니 "저는 별을 잘 못 그리거든요." 한다. 초등 2학년에게 별 그리기가 난이도 높은 작업임을 그새 깜빡. 그래, 그래, 네가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아무 거라도 좋아, 했더니 아이번호에 세모를 그렸다. 내게 평가지의 세모는 부분적으로 맞은 문제에 부분적인 점수를 주겠다는 뜻이지만, 학습 정도를 확인하는 간단한 학습지이니 아무려면 어떻나. 어려운 부분을 잠시 건너뛰고 할 수 있는 문제를 먼저 푼 후에 다시 한번 문제의 질문부터 천천히 다시 여러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잠시 후, 아이는 또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다시 봐도 모르겠어요."

"그럼 네가 모르는 것이야. 그대로 놔두고 나중에 선생님과 문제 풀이를 할 때 좀 더 집중해서 설명을 듣고 알도록 하자."


지금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부딪혔을 때, 도무지 무슨 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순간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건너뛸 용기가 필요다. 용기를 내어 건너뛴 문제는 언젠가 또 비슷한 유형의 문제로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으니, 건너뛸 때는 자신만의 표식을 해 두면 좋겠다. 언젠가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차분히, 곰곰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반갑지 않은 이런 문제들과의 또 다른 조우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다시 살펴봐도 도통 해결방법이 없는 것 같은 문제는?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나를 돕는 우주의 기운에 기댈 줄도 알아야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우주의 기운이 될 수 있다. 우린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가정과 사회, 그 어떤 공동체의 일원일 테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 너무 주저할 필요가 없다. 세상엔 누군가를 돕는 일에 존재의 희열을 느끼는 '다정한 인류'가 생각보다 많다.


언젠가 양파 김치가 미치도록 먹고 싶던 때가 있었다. 양파 김치는 어릴 적 나고 자란 내 고향에선 흔히 먹던 김치 중 하나다. 오히려 들어가는 재료 손질법이 간단하여 다른 김치들보다 담그는 방법이 쉬워 보였는데, 일과 육아, 살림을 함께 한다는 핑계로(사실은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똑 부러지지 못하면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요리는 피하게 되었다. 자식들 먹이려고 사시사철 좋은 식재료로 각종 김치를 담가주시던 시어머니 덕분에 김치 담그는 지난한 과정에 비껴 살 수 있던 덕분이기도 했다.


양파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 주변 반찬 가게에 문의해보니 아예 메뉴에 없단다. 너무 먹고 싶구입하기어렵다고 하니, 남편이 "엄마한테 담가 달라고 할까?" 했다. 저러니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하. 이제는 연로하셔서 본인 것도 제대로 해 드실지 걱정인데, 김치를 담가 달라니. 먹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아내가 모처럼 간절히 소망하는 음식이니 어떻게든 공수해 주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야 고맙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언젠가 좀 여유가 있을 때, 그때는 시어머니께 여쭤봐서 내가 직접 담가보리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시형님께서 택배 한 상자를 보내신 것이었다.


형님께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반찬집이 근처에 있다며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조금씩 여러 김치 종류를 담았다고 하셨다. 박스 하단에 섞박지처럼 생긴 김치가 있기래 익혀 먹려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며칠 지나 꺼내 열어보니, 그렇게 먹고 싶었던 '양파 김치'가 아닌가? 내 고향땅 반찬집에 그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했다. 


양파 김치를 본 순간, 뭉클했다. 내 마음을 읽으신 듯 토록 먹고 싶어 하던 것을 보내주시다니, 우주의 기운 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장 막 한 더운밥 위에 양파 김치를 얹어 입에 한 입 넣는 순간, 입과 위를 가득 채우는 무한 감동의 맛이라니!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누군가는 대관절 양파 김치가 뭐라고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입맛의 힘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그 감동 그대로 전달한 내 메시지에 오히려 감동받으시고 앞으로도 입맛 없을 계절엔 김치를 쏘시겠다시며 말리지 말아 달라던 형님. 그 뒤로도 말릴 수 없는 형님의 김치를 얻어먹고 있으니 나를 돕는 우주의 기운 중 하나이신 형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양파 김치로 나눈 시형님과의 정. by 그루잠



어제 교원으로 구성된 한국식 오카리나 동호회, '강물처럼' 사제동행 상반기 연주회가 있었다. 고양문화원 야외 공연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연주회. 오락가락하는 빗속에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연주회 5분 전까지 흩뿌리던 빗줄기에 고양문화원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연습하대기 중이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공연시간 오후 6시가 되자 비가 멈추었다. 덕분에 순조롭게 연주회가 진행,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오랜 코로나 기간 동안 줌 수업으로만 수업을 진행해 오며 '함께 하는 소리'에 목말던 갈증을 다소나마 해갈할 수 있었던 하루. 학기말 평가 업무 등으로 인한 턱없는 연습 부족으로 공연 내내 내 오카리나 소리만 신경을 썼던 하루기도 했다.


무사히 연주회를 마치고 풀린 긴장감에 노곤해져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의 요리, 삼계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알맞게 익은 닭고기에 쌀 양을 잘 못 맞춰 엄청나게 불어난 양의 닭죽까지 두 그릇 먹어치우고 나니 눈꺼풀이 세상을 다 진 듯 무거웠다. 두어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겠다고 알람을 맞춰 놓고 저녁 8시 반에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동호회 밴드에 탑재된 연주회 사진을 그제야 확인했다. 내 눈앞의 일에만 신경 쓰던 순간에 누군가는 다른 모든 이들의 순간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 시작 전부터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오르는 연주자들이 빛날 수 있도록 애써 준 고마운 분들이 모두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무대 위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전문 오카리니스트 뿐 아니라 우리 같은 아마추어 회원들과 연주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동분서주했을 스태프들을 잊지 않고 사진으로 담아주신 사진사님께 감사하다.


고양문화원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 교원 오카리나 동호회, '강물처럼' 사제 동행 야외 연주회. by 그루잠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돌보는 모든 우주의 기운 덕분에 부족하고 불완전한 나도 새 날을 맞이하고 온전히 살아낸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 도저히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내 주위에서 도울 거리가 없나, 하고 떠도는 우주의 기운에 기대 보자. 그 덕에 좀 더 나아진 내가 되어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우주의 기운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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