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학교에 항상 이 말을 달고 사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삶에서 어느 한 부분이 플러스가 되면 다른 한 부분은 반드시 마이너스가 되는 거(앞 뒤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라며 더하고 빼면 결국 제로가 되는 게 인간사라 하셨다. 여고생들이 좋아할 만한 첫사랑 얘기도 아니고 아름다운 우리 젊은 날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얘기도 아니어서 그땐 선생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20년도 더 전의 초임 교사 시절, 매달 17일이 되면 교무실에서 종이로 출력된 급여 명세서를 배부해 주었었다. 어느 날, 내 월급 명세서를 집었다가 바로 밑에 놓여 있던 50대 후반 교감 선생님의 월급 명세서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명세서에 찍힌 초라한 급여 액수와는 비교 불가한 큰 액수에 놀라,
"와! 교감 선생님, 너무 부러워요!"
숨기지 못하고 부러움을 절로 토해냈다. 그 말에 교감 선생님은, "그게 부럽냐? 그럼 내 월급하고 네 젊음을 좀 바꿔주련." 하셨다. 서로 부러운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가치를 상대만큼 알지 못했다.
나와 남편은 서로의 직장 문제로 결혼 직후 3년 간 주말 부부로 지냈었다. 남편은 서울, 나는 남도 끝자락으로 떨어져 주말부부로 보낸 그 3년 간은 5년 간의 연애 시절보다 더 애틋했다. 주말, 바쁘면 2 주말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헤어지는 버스터미널에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어서 벗어나고만 싶던 그 시기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결혼한지 3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합쳐 살기 시작했을 때, 결혼 생활이 꿈에 그리던 꽃밭이 아니라 전우애가 넘쳐나는(?) 전쟁터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떨어져 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지고 볶으며 살아봐야 부부 사이를 넘어 인간에 대한 연대와 연민의 뿌리가 깊어진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야 안다.
어떤 인간 관계도 너무 멀면 애틋하고 너무 가까우면 버겁다. 우리 부부가 떨어져 살던 3년 동안 길에 뿌린 교통비만 모았어도 집을 샀을 거라던 농이 통했던 때였다. 살다 보니 그 3년의 기억으로 30년, 아니 남은 생을 살게 될 것 같으니, 그만한 비용은 지불 가치가 있었던 것이려나.
내가 그 선생님의 나이가 되어 보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부산스럽던 20대 때는 나만의 공간에서 책을 가득 쌓아두고 몇 날 며칠 책이나 읽으며 살 수 있는 여유를 바랐다. 그런데 정작 그럴만한 여유가 생기자 노안으로 장시간의 활자 읽기가 버거워졌다. 총기가 넘쳤을 땐 밖으로만 향하던 에너지를 이제는 좀 내 안으로 모아보려니 총기가 현격히 떨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서 돈이던, 명예던 뭔가를 얻으려 하면 몸과 마음이 축나기 마련이다. 막역했던 친구나 사랑했던 연인과 멀어져 더는 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할까 두렵던 시간의 공백만큼 언제나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은 찾아와 주었다.
일과 승진에 매진하던 시기의 젊은 아빠는 그것이 어린 자녀들의 일상과 가장 젊고 아름다웠을 아내와의 시간을 맞바꾼 결과임을 뒤늦게야 안다(늦게라도 알면 다행이다).젊은 시절엔 여유가 없고, 여유가 생기면 젊음이 없다. 세상사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기고, 잃는 게 있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는 법이다.
고1 딸이 불만족스러운 기말고사 결과에 진로 걱정이 한가득이다. 고민의 고통만큼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너무 고민의 늪에서 오래 허우적대진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사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