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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l 01. 2023

타인과의 문제가 생겼을 땐 '마음 신호등'을 켜세요

멈춘다-생각한다-표현한다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단비(가명)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가와 부루퉁한 말투로 말한다.

"선생님, 새롬이(가명)가 포카를 줬거든요. 그런데 다시 달래요. 전 줄 마음이 없거든요."

응? 뭐? 포.. 카..? 내가 '포커'는 안다만... '포카'는 뭘까? 모르는 걸 아는 척하고 있다간 사실 파악이 늦어진다.

"음.. 근데 포카가 뭐야?"

"네, 진스 포카요!"

포카가 뭔지 물었는데 모르겠는 말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래도 이번엔 다행이다. 집에 청소년이 둘이나 있으니 TV나 유튜브를 안 봐도 걸그룹 이름 정도는 낯설지 않았다. '진스' 멤버가 몇 명인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는 알 길도, 관심도 없지만(진스 팬께는 죄송) 걸그룹 유튭 방송을 TV로 켜놓고 춤을 추며 공부 스트레스를(공부를 안 해도 공부 스트레스는 온다) 날리는 딸아이를 종종 보아온 탓에 낯익은 이름이 절로 반갑다.

진스가 걸그룹이란 걸 아니 '포카'가 '포토 카드'의 줄임말이구나, 맥락상 이해가 되었다. 아, 문화지체를 따라잡으려면 아이돌 그룹에 대해 우리 집 청소년들에게 과외라도 받아야 하나.

"아! 진스~ 근데, 그게 왜?"

단비는 담임이 진스를 모르는지, 포카를 모르는지도 모른 채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단비의 말인즉, 새롬이가 진스 포카를 가지라고 줬는데 마음이 바뀌어 다시 달라고 다는 거다. 자기는 진스 포카가 너무 갖고 싶었던 물건이고 자기 스티커랑 교환 거래를 했다며 이제 자기 손에 들어온 이상, 돌려줄 마음이 1도 없음을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새롬이를 불렀다. 새롬이에게 단비가 한 말을 들려주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새롬이단비에게 포카를 준 것은 사실이란다.

"줬으면 이제 단비 물건인 거 아니야?"

"근데, 그게요. 제가 진스 포카를 단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요."

"근데 왜 줬어?"


새롬이의 말인즉, 자기에게 진스 포카가 있다는 말을 했더니 단비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학교에 가지고 와 보라고 했다는 거다. 보여주기만 하려고 했었는데, 포카를 보자마자 단비가 너무 예쁘다고 달라고 그렇게 요청을 하더란다. 처음엔 새롬이도 안 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말했었는데 단비가 반복해서 요청하니 둘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 마음이 약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티커와 바꾸자는 단비의 말에 바꾸게 되었다고.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아무래도 진스 포카를 준 건 아니더라는 것이었다. 스티커가 마음에 들어서 바꾼 게 아니라 단비가 하도 갖고 싶어 하니 불편해질 관계가 편치 않아 그냥 바꿔 준 거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가 아끼던 진스 스티커가 눈앞에 어른거렸던 모양이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단비와 새롬이는 소위 절친이나 두 아이의 성향이 매우 달라서 같이 어울리면서도 관계가 마냥 매끄럽지는 않았다.

단비는 호불호와 주장이 뚜렷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과감 없이 말하나 뒤끝이 없는 아이다. 새롬이는 조심스럽고 섬세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와 마음이 돋보이지만, 자신의 욕구를 내세우지 못한 채 상대 위주로 맞추고 그러다 보니 내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는 아이다.


성향상 반대편에 있는 두 아이가 서로에게 끌려 절친이 된 것은, 아마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가진 상대가 굉장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극과 극이 통해 만나졌지만 지내다 보면 서로의 차이로 인해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 일이 종종 생기는 관계다. 상처는 대개 자신의 욕구를 잘 드러내지 않고 상대에게만 맞추는 쪽이 받기 마련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 상황 중 가장 애매한 일이 이런 류다. 절친 여자 아이들 간의 미묘한 감정싸움 말이다. 아이들의 평소 기질을 알고 있으니 두 아이의 입장을 듣고 어느 편 입장만을 옹호해 주기도 어려웠다. 이미 준 물건은 상대방의 소유로 인정해야 마땅하겠지만, 정황상 단비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새롬이의 약한 고리를 건드린 부분이 보이고, 새롬이가 처음엔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을 단비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담임 입장에서 새롬이에게 이미 준 물건은 상대방 것이 됐으 단비에게 주는 게 맞아, 라거나 단비에새롬이가 처음에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 달라고 했니, 등으로 문제를 접근하려다 보면 두 아이 모두에게 깔끔한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게 뻔했다.


수업 시간과 맞물려 더 길게 이야기 나눌 수 없는 상황이어서 두 아이의 물건을 모두 가져오도록 했다. 서로 교환 거래했다는 단비의 스티커와 새롬이의 진스 포카를.

"그럼, 얘들아. 두 물건을 선생님 책상 위에 두고 가고 너희들도 다시 생각해 본 뒤 점심시간쯤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단비와 새롬이 모두 당장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겠지만, 시원한 해결책이 없을 땐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두 아이 각자에게 이 질문을 덧붙였다.

"그런데 단비(새롬)야, 진스 포카와 새롬이(단비)와의 관계 중 어느 쪽이 네게 더 소중해?"

아이들의 대답은 같았다.(예상하신 대로... :))


그다음 쉬는 시간이 절반쯤 지났을 때 단비가 먼저 와서 반가운 말을 전해 주었다.

"선생님, 저 진스 포카 새롬이에게 돌려줄래요. 처음엔 동생이 워낙 좋아하는 물건이라 주고 싶어서 달랬던 거였는데 이제 괜찮아요."

새롬이도 종종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 진스 포카 안 돌려받아도 돼요. 그냥 단비 줄래요."

이젠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다. 똑똑한 아이들이라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구나. 기특한 것들.

뜸 들인 시간은 각자의 욕구만을 내세우던 성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의 마음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할만한 여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물건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상황을 처음으로 돌려놓고 다시 생각해 보자. 원래 자기 물건을 각자 가지고 가고 점심시간 때쯤 한 번 더 이야기하자."

점심을 먹고 두 아이에게 물어보았을 땐 문제 상황조차 사라지고 예의 절친 관계로 돌아가 있었다. 서로를 향한 서운함과 미움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환한 표정이었다.

하교할 때 친구 관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 두 아이들의 결정이 대견하다고 해 주었다. 아이들이 밝게 웃더니 책가방을 출렁거리며 함께 뛰어갔다. 아이들이 오늘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현명한 결정에 마음껏 뿌듯해하길 바랐다.



'말마음 연구소' 소장이자, <리더의 말그릇> 저자인 김윤나 소장은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 '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도 못하면서 상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말이 전부라고 믿는다고 말이다.

친구와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우리 아이들은 초등 2학년 교육과정에서 배운다. 타인과의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땐 마음 신호등을 켠다. 그리고 '멈춘다-생각한다-(상대방 입장을 고려하며) 표현한다'. 이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뜸 들이는 시간'이다. 불편한 감정을 위험 요소로 착각하고 방어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려 폭발하는 대처로는 아무 일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 초등 2학년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해결했으면 좋겠다.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반복해 보자. '멈춘다-생각한다-(상대방 입장을 고려하며) 표현한다'.


이번 주말도 다들 평온하시길.


마음 신호등은 상대에게 미리 보내는 텔레파시일지도.(그림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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