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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Feb 25. 2023

양다리에 서툰 교사의 당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계속 미루고 있을 때 생기는 일. 무슨 일을 끝내도 개운치 않고 딱히 어디라고 짚을 순 없지만 어느 한 군데가 막힌 것 같은 답답한 기분. 어린이의 문장을 책으로 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 하나를 남겨두고 내내 미루고 머뭇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딸이 5살 때, 이른 아침부터 아이를 맡길 만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찾지 못해서 근무하던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데리고 다녔었다. 어린 딸과 매일 왕복 70km가 넘는 곳을 운전해 통근하던 기간이 도합 2년. 그 고단했던 출퇴근 길을 반짝이는 여행길로 바꿔주던 순간이 있었다. 퇴근길 뒷좌석에 앉은 5살 딸이 차창 밖을 소재 삼아 종알종알 말들을 쏟아내던 순간이었다. 태양을 집어삼킨 구름에 대한 얘기라던가, 차창에 흘러내리던 빗방울에 대한 얘기라던가. 기록으로 남겨 두지 못해 내내 아쉬웠던 아이의 들. 2학년 우리 반 아이가 쓴 '구름들이 수다쟁이들처럼 모여 있는 것 같다'는 종류의 아름답고 투명한 문장들. 그런 순간들은 다시 오지 않으므로 사력을 다해 남겨야 했다는 것을, 그땐 난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글과 함께 하며 마음에 남는 문장들로 글을 쓸 때, 난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홉 살 시기에 했던 생각과 말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져 버린다. 그때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으로 반짝였었는지, 하는 말마다 어쩌면 그렇게 시적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았는지, 얼마나 호기롭고 당당했었는지...

사라지면 아쉬울 아이들의 문장을 기억하며 한 편, 한 편 글로 남겼을 때는 그것이 책으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내내 머뭇거리며 미루고 있었던 일은, 문장의 주인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가명으로 인용했던 아이들의 문장을 책에 인용하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일로 학부모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은 교직 생활 2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만약 학부모가 인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해당 아이의 문장은 삭제하고 글을 다시 쓰면 된다.' 

심플한 결론이었지만, 그래도 얼른 연락할 생각이 들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새해가 되고 이틀 뒤, 지잉~ 문자 메시지 하나가 날라 왔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랑 00 엄마는 가끔씩 선생님 생각이 나요. 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고 가족분들 모두 다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2년 전 담임을 맡았던 아이, M의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였다. 2년이나 지났고 학교를 옮기기까지 했는데 잊지 않고 문자를 주시다니, 너무 반가웠다. 4년 전엔 M의 누나 담임을 맡기도 했었다. 학년당 8~10개 반이나 되어 학생수가 적지 않았던 학교에서 남매의 담임을 맡는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인연은 아니었다.

맡았던 딸, 아들 모두 반듯한 인성에 매사 열심인 아이들이었어서 어느 담임을 만났어도 총애받을 만한 아이들이었으나, 어머님은 더 훌륭하신 분이셨다.

학부모 상담을 오셔서는 늘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믿는다"며 그저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 상담 신청한 거라던 M의 어머니는, 언제나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던 분이셨다. 학부모님의 믿음과 지지는 언제나 교사 사기 진작의 특효약이다. M 어머니와 같은 학부모님 덕분에 보약을 먹은 듯 불쑥, 힘이 나곤 했다.


그러니 내 글 한 편에 M의 문장 하나가 인용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이 글의 인용 동의를 구할 첫 번째 대상 학부모가 M의 어머니이었던 것도. 어머니께 아이들의 호기로운 문장을 통해 MZ세대를 위로할 목적으로 책을 기획하고 있으며 곧 출판 예정이라는 점, 책에 M의 문장을 인용해도 될지 동의를 구한다는 점 등을 말씀드렸다.

"선생님! 너무 영광이죠!"

핸드폰 너머 M 어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본인 일처럼 기뻐하시며 예전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모습이.  


M 어머님과의 통화 뒤 다른 문장들의 주인인 아이들의 어머님들과도 차례차례 전화를 이어 나갔다. 다행히 어머님들은 하나같이 기뻐해 주시고 흔쾌히 아이들의 문장 인용에 동의해 주셨다.

"우리 애 글이 책에 인용할 만한 게 있던가요?"

하시는 한 어머님의 말씀에 웃음 짓기도 하고,

"저희 아이 글엔 실명으로 써 주시면 더 좋겠어요! 아이가 너무 좋아할 거예요."

하시는 한 어머님 말씀에 뭉클하기도 했다.


인용 문장의 아이들 부모님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아직은 진행 중이다. MZ세대를 위로할 목적으로 기획했다고는 지만 아이들의 글로 위로받은 가장 큰 수혜자는 나였다. 궁극의 순수를 만날 때 느끼는 감동은 세대를 떠난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리라.


난 양다리를 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새 학년을 맞아 새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과 인연을 만들어 가느라 온 정신이 팔려 한동안 이전에 맡았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잠시 내려놓게 될 것이다. 그러다 새 인연들과 어느 정도 익숙한 모양이 만들어지면 그때는 가끔 이전의 아이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이다. 책이 나올 때쯤이면 그 시기가 되려나.


그때까지 이전의 내 아이들아, 내가 조금 소원해 보이더라 너무 서운해 말길 바란다. 너희들을 잊지 않으려고 내 글에 꼭꼭 붙들어 놓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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