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Dec 17. 2022

초등 2학년 어린이들의 사랑법에서 내가 배운 것


국어 시간.

칭찬하는 말을 하거나 들었던 경험을 떠올려 써 보는 시간이다. 자기 것을 먼저 끝낸 남이(가명)는 또 굳이 다른 줄에 앉아있는 여이(가명) 옆에 다가가 주변엔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알려주고 있다. 저렇게 속삭이듯이 말하는데 남이 목소리가 여이 귀에 들리기는 할까? 머뭇거리던 여이의 빈칸이 채워지는 걸 보니 분명 여이의 귀에는 또렷이 들리는 모양이다.


남이는 남자아이로 작은 체구에 목소리도 작지만 친절하고 다정하며 선한 눈매를 가졌다. 여이는 여자아이로 깨끗한 이마에 크고 예쁜 눈이 아이들이 어릴 때 갖고 놀던 귀여운 콩순이 인형 같다. 남이나 여이나 말수가 적은 데다 온순한 성품이라 여러 명의 아이들 사이에 있을 때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조용한 두 아이가 자꾸 내 눈에 띈다. 두 아이의 서로에 대한 이끌림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반전은, 여이가 넘이(가명)라는 남자아이와 공식 커플이라는 거다. 두 아이가 서로 커플이라는 사실을 넘이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1년이 다 가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국어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소개하는 다섯 가지 문장으로 퀴즈를 내면 친구들이 상대를 알아맞히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넘이가 앞으로 나와 2개째 문장을 말했을 때 이미 설명하고 있는 대상이 여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초등 2학년 어린이의 문장은 숨김이 없는 초정밀 현미경이니까. 그래도 나는 넘이의 마지막 문장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애는 저의 여자 친구입니다!"  


우리 반 아이들 전체가 순간 와! 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전까지 상대를 맞추기 위해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이들의 팽팽했던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온 교실에 너울거렸다. 아이들은 다 웃고 있는데 나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야?"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답이 태산처럼 몰려왔다. 넘이에게 언제부터 여이랑 커플이었냐고 물었더니 여름방학 때 만나 고백한 뒤로 사귀기로 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바꿨을 때, 넘이와 여이가 짝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난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뽑은 번호 순서대로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우리 반 자리 선택 방식에 따라 서로 짝이 되었으니 사전에 서로 말을 맞췄다는 게 합리적인 생각일 게다. 감기와 사랑은 숨기지 못하는 법이라는데 그런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니, 참 둔하다 둔해!


초등학교 2학년. 이 어린아이들이 마음을 고백하고 공식적으로 사귀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이 모든 일들이 어릴 적 꽤나 자주 했던 소꿉놀이처럼 다정하되 진지하다. 내가 초등(그땐 국민) 학교 1학년 때, 하교 후에 동네 친구들이랑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옆집 살던 잘생긴 2학년 오빠가 아빠 역할을 한다고 해서 엄마 역할을 따내고 싶어 경쟁자들과 치열하게 겨뤘던 어린 . 그땐 참 뭐가 그리 진지하고 신나고 재밌었을까.


그런데, 가만있자... 지금 여이 옆에 항상 다가와 여이가 곤란해하는 문제를 도와주는 아이는 넘이가 아니라 '남이'! 한 번 짝이 된 친구와는 연속해서 짝을 할 수 없다는, 나름 엄격한 자리 선택 기준 때문에 넘이가 둘의 커플 관계를 공식화하기 전까진 둘이 다시 짝이 되지는 못했다. 내가 의도치 않게 두 어린 연인을 갈라놓은 못된 어른이 되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이상하다.

내가 아무리 둔해 넘이와 여이의 관계는 눈치채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남이와 여이의 다정한 모습은 자주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넘이와 여이가 여전히 사귀고는 있는 걸까? 그럼 남이는 왜 저렇게 다른 이의 공식 여자 친구인 여이를 매번 살뜰히 챙기고 있는 거지?


담임선생이 애들 하나라도 더 가르칠 생각은 않고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느냐는 책망은 말아주시길. 23년 차 베테랑 교사에 8년째 2학년 담임이라면 이제 수업의 1, 2, 3은 놓치려야 놓치기도 어려우니까. 그러다 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런 것들도 눈에 다 들어와서 때론 즐겁고 때론 애매해진다.  


커플 사이에 누군가 한 사람 더 끼어들어 생기는 모호한 감정의 상황을 우린 보통 '삼각' 관계라 부르는데, 이 2학년 아이들에겐 보통의 삼각관계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1도 없다.


넘이는 반 전체 아이들 앞에서 여자 친구라고 공언한 아이다른 남자아이와 다정해 보여도 도통 관심이 없다. 수업 시간엔 제 것 하기 바쁘고 쉬는 시간엔 다른 남자 애들과 종이로 만든 칼싸움 놀이하느라 바쁘다. 커플이라는데 짝꿍일 때를 제외하고는 둘이 뭔가를 함께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수업 중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끙끙거리는 여이를 챙기는 이는 항상 남이다. 에너지가 온통 밖으로 향해 있는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놀러 나간 점심시간에 교실에 남아 지우개 놀이를 하며 뭐가 그리 재미난 지 연방 깔깔깔 웃음이 떠나지 않는 두 아이.


첫사랑의 기억이 있는가.

그 아련하고 설레던 기억. 도통 다시는 그처럼 마음 다하지 못할 것 같은 순수 그 자체. 남이와 여이에게서 그런 하얀 순백의 마음이 느껴져 두 아이를 볼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첫사랑의 감정이란, 당시 마음을 주었던 상대보다는 그 맑았던 시절의 나에게 다시 반하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하며.


난 그 둘의 이끌림을 마음속으로 응원한다.(오늘도 종이 칼싸움하느라 여념이 없는 넘이가 이런 나를 미워하지 않길 바라며)

고백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공기처럼 함께 숨 쉬며 꾸준히 지켜가는 게 사랑이라는 걸, 난 또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사랑은 공기처럼 함께 숨 쉬며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사진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문방구'는 어디로 갔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